주기도문을 한 구절 한 구절 음미하면서 기도를 한다면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는 쉽게 말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타산적인 분이 아닙니다.
애초부터 우리가 하나님 마음에 들게 처신했더니 그런 우리를 어여삐 여기셔서 예수님을 보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격 요건을 따지지 않고 일방적으로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셔서 사랑하시고 결국 사랑할 만한 수준으로 만드시는 분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은 다음에 말을 잘 들으면 호적에 입적시키고 말을 듣지 않으면 내쫓는 것이 아니라 힘쓰고 애써서 키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은 마치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면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시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위배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우리의 처신을 보면서 합격과 불합격을 판정하시는 조건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탕자의 비유가 단적인 예입니다.
탕자가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챙겨서 집을 나갔다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허비하고 주려 죽을 지경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매일같이 동구 밖에 나가 기다리던 아버지가 아들이 들어오는 것을 먼저 보고는 달려가서 아들을 맞아들이고 집에서 잔치를 베풀었다는 내용이 누가복음 15장에 나옵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아들을 용서한 시점이 언제입니까?
돌아온 아들이 손이 발이 되게 비는 모습을 보고서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돌아오면 용서하고 돌아오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마음속으로 용서해 놓고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굳이 “용서”라는 측면에서만 따지면 돌아오지 않아도 용서는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지 않으면 자기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모르게 됩니다.
용서는 아버지 입장에서 베푸는 관용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탕자 입장에서 자기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하고 기도하는 원리도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한테 잘못을 했을 때 그 잘못을 먼저 용서해야만 하나님이 그 내용을 책에 기록해 두셨다가 “아, 저 놈은 쓸 만해” 하고 용서해 주시고, 만일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저 놈은 안 돼”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았으면 그 표가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사함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죄를 사함 받은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 증거가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베푸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베푸는 것이 자기의 죄를 사함 받은 증거입니다.
어떤 집 애가 집에 놀러온 친척 어른한테서 용돈 만 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 애의 주머니에는 만 원이 있든지, 조립식 완구가 있든지 아니면 과자 봉지와 잔돈이 있든지 하여간 만 원을 받은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정신없이 놀다가 만 원을 잃어버렸으면 아쉬운 마음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아무 것도 없었던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남을 용서한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은 흔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하고 기도는 하면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에 인색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천생 “내가 고의적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고의적으로 제 죄를 용서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 것 같이 나도 용서받지 못하고 죽게 하옵소서”라는 뜻이 됩니다.
상당히 끔찍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 무조건적인 용서를 원한다면 자기도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을 용서하지 못한다는 얘기는 자기도 용서받았는지 말았는지 모른다는 뜻이고, 결국 자기 자신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용서를 기대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스펄젼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주기도문을 반복한다면 당신은 그때마다 자신에게 대한 사형 판결문을 낭독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 기도는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만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불신자는 자기가 용서받은 것이 없으니까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그냥 자기들 멋대로 살다가 멋대로 죽으면 됩니다.
그런 불신자 흉내를 낼 이유가 없습니다.
<하늘에 닿는 기도> p12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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