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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자리/믿음의 자리

하늘에 닿는 기도 - 7

minkyo 2022. 2. 7. 08:52
교회에서 흔히 쓰는 단어 중에 “예배”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는 예배라는 단어가 한 차례도 나오지 않습니다.
“예배”라는 단어가 나올 만한 자리마다 경배나 제사, 희생이 나옵니다.
(1998년 설교입니다. 개역한글판 기준입니다.)
특히 예배드리는 것을 희생을 드린다고 표현하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올 적에는 자기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요소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사실 저는 교회에서 “희생”이라는 단어를 쓰는 사실에 대해서 상당한 유감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왜 굳이 “희생”이라는 단어로 설명해야 합니까?
“주를 위해서 희생한다”는 표현은 옳지 않은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손해가 아니라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부 다 세속적인 안목에 젖어 있으니까 그것이 희생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애인에게 줄 생일 선물을 장만하느라고 5만 원을 지출하면서 “희생”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애인 없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쓸데없이 남한테 없는 애인이 있는 바람에 없는 살림에 돈만 축난다”라고 했다가, 없는 것도 서러운데 누구 놀리느냐는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은 희생이 아니라 기쁨이고 자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이 왜 희생이 됩니까?
왜냐하면 그것을 하기 싫은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욕심과 목표가 세속적이다 보니 잠깐 시선을 돌려 올바른 쪽을 바라보는 것조차 손해로 생각되고 희생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부담 없이 믿으려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공부에 부담을 갖지 않으려는 학생치고 공부 잘하는 학생은 없는 법입니다.
학생에게 있어서 공부는 당연히 부담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대입을 앞둔 고 3생이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악착같이 부담을 갖지 않으려는 학생은 대학은 엄두도 못 내고 그저 고등학교만 무사히 졸업하면
그것으로 감지덕지할 학생입니다.
설교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설교에 몰두하는 방법입니다.
설교가 지루하다고 해서 딴 생각을 하다 보면 30분 설교가 3시간으로 느껴집니다.
끝날 때쯤 되었다 싶어서 시간을 보면 겨우 3분 지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담 없이 예수를 믿으려고 하면, 그 부담 없이 믿고자 하는 마음이 오히려 부담이 됩니다.
반대로 부담을 기꺼이 감수하면 부담이 없어집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는 말씀은 전도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당히 유명한 말씀입니다.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귀 너머로 서너 번씩은 들어보았을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 다음에는 어떤 내용이 나와야 하겠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했으니까,
그다음에는 “너희의 모든 짐을 내가 다 대신 져 주마” 하는 내용이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짐을 대신 져 준다는 얘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얘기가 있습니다.
오히려 멍에를 메라고 되어 있습니다.
짐을 제대로 지는 법을 배우라는 얘기입니다.
바로 이것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진정 안식을 얻는 비결입니다.
자기의 짐을 들고 예수님께로 나오면 예수님이 다 책임져 주시고 우리는 두 다리 쭉 뻗고 낮잠을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짐 위에 짐 보따리 하나를 더 올려 주십니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짐을 지면 이전에 있던 짐의 무게조차도 가벼워진다는 역설입니다.
주님의 뜻은 책을 통해서나 명상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서 배우는 것도 아닙니다.
멍에를 메고 직접 몸으로 부대끼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기도를 열심히 해서 자기가 메어야 할 멍에를 때우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누가 멍에를 잘 메느냐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주님의 뜻을 거역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지기를 바랄 수 없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소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바란다면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어쩌다 한 번 모질게 마음먹고 죽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 일상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에 닿는 기도- 강학종 목사> p8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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