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시절, 겨울철이면 의자에 앉은 채 의자의 등걸이 위로 외투를 입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의자와 자기가 묶여 있기 때문에 일어날 때마다 외투를 벗어야 합니다.
그것이 귀찮아서라도 화장실에 가는 횟수를 두 번에서 한 번으로 줄이게 됩니다.
특이한 사실은 성적이 별로 신통하지 못한 학생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데, 주로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은 아무 때나 무료하면 일어나고, 졸리다는 핑계로 두 시간씩 바람을 쐬는데,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일어나고 싶어도 마음대로 일어날 수 없게 자기 몸을 묶어서 공부를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영어를 잘하는 학생들은 한 시간에 영어책 열 페이지는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를 못하는 학생들은 한 시간에 반 페이지도 제대로 공부하지 못합니다.
영어를 못하는 학생들은 일단 단어부터 외워야 합니다.
영어 공부한답시고 하루 종일 단어만 외는 애들은 보나마나 영어 못하는 애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같은 시간을 공부해도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못하는 학생보다 훨씬 더 능률적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됩니다.
일종의 부익부빈익빈인데, 신앙에 있어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약도를 가지고서 모르는 길을 찾아가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이때 가고자 하는 목적지의 정확한 위치는 몰라도 그 근처에 아는 건물이 있으면 더 쉬울 것입니다.
목적지와 가까운 곳을 알면 알수록 그만큼 유리합니다.
잠실야구장 근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잠실야구장의 위치를 설명 듣는 것보다 올림픽도로나 무역센터를
아는 사람이 설명을 듣는 것이 훨씬 더 쉽게 마련입니다.
뭔가를 알면 아는 만큼 편리하고, 반대로 모르면 모르는 만큼 힘이 듭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별도 그렇습니다.
하나라도 더 알면 아는 만큼 자기에게 유익이 있습니다.
모르면 모르는 만큼 손해입니다.
요컨대 우리가 교회에서 부러워해야 할 모습은 자기 자신의 뜻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에 잘 순복하는 모습입니다.
남의 아파트 평수와 사윗감, 남편 월수입이나 부러워하고 기껏 종교적인 색채를 갖는다고 해봐야 방언이니 통변이니
신유니 하는 것을 부러워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물론 방언과 통변, 신유는 전부 다 성령의 은사들입니다.
하지만 그런 은사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앙은 아닙니다.
자랑은 더욱더 아닙니다.
자기에게 그것이 있어서 자기 신앙에 도움이 되어야 하고 교회에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의 종교적인 우월감을 확보하기 위해서 성령의 은사가 동원되는 것은 심히 곤란합니다.
특히 안타까운 것은 여태까지 성령의 은사를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많이 보았어도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부러워해야 할 것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인데도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를 구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신앙을 근거로 해서조차도 구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의 잘남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귀결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한 번 더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결심만 하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해야 합니다.
이를 악물고 각오하면 하나님이 그 진심을 보시고 대신 해 주시는 것도 아니고 간절히 기도해서 때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하는 일 중에 가장 하기 싫은 일은 설교를 준비하는 일입니다.
정상적인 경우를 가정하면 아직도 30년은 더 목회를 해야 하는데 그전에 주님이라도 빨리 오셔야지, 안 그러면 그야말로 야단났습니다.
(39살 때 설교한 내용입니다.)
한 편 준비하기도 힘든 설교를 앞으로 30년 동안이나 해야 합니다.
그나마 지금은 부교역자라서 설교 부담이 덜한 편입니다만 이다음에 담임 목회를 하게 되면 대체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벌써부터 고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하기 싫으니까 하지 않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 되겠습니까?
아니면 하늘에서 설교 원고가 떨어질 때까지 열심히 기도를 할까요?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설교 준비를 하기 싫은 것은 하기 싫은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제 책임입니다.
기도해서 외면할 수도 없고 기도해서 건너뛸 수도 없습니다.
그저 한 주 한 주 설교를 준비하기에 족한 영감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고, 하기 싫어도 억지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일이 그렇습니다.
기도를 해서 자기 책임을 외면하거나 기도하는 것으로 자기 책임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거기에 순복해야 합니다.
이를 악물고 해야 합니다.
하면 한 만큼 유익입니다.
<하늘에 닿는 기도- 강학종 목사> p9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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