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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자리/믿음의 자리

<생활성서> 내 눈을 빌려주고 싶습니다

minkyo 2022. 12. 14. 11:36
주간 평화교회 115호| <생활성서> 내 눈을 빌려주고 싶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조롱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다. (잠 17:5, 새번역)
 
    추석을 앞두고 잠시 펜을 들었다. 목사가 되어 안 좋은 점이 한 가지 있다면, 명절에 부모님을 뵙기 어려울 때가 많다는 점이다. 그나마 평신도인 형을 대신 보낼(?) 수 있는 상황이라 참 다행이다.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나에게 추석은 ‘새우튀김을 먹는 날’ 이었다. 6학년 때까지 재래식 화장실이 딸린 집에 살던 형편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큰 맘 먹고 부엌에 쭈그리고 앉아 열심히 튀김가루와 계란 옷을 입히시는 엄마 옆에서 신나서 ‘주워’ 먹었는데, 울 엄마는 한 번도 핀잔을 주지 않으셨다. 지금보다 많이 없이 살았지만, 엄마라는 큰 우산을 쓰고 살던 그 시절이 사무치게 그립다. (물론 아빠도.)
 
    새우튀김을 열심히 주워 먹던 시절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 했다. 명절이 되면 더 외로운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런데 요새는 비교적 아는 게 많아져서 그런지, 아니면 철이 들어서 그런지, 그것도 아니면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그런지, 어쨌든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참 생각이 많아진다. 소위 가난한 이들의 존재가 자꾸 떠올라 미안해지는 것이다. 물론 내가 재벌인 것도 아니고, 교회에서 받는 월급도 ‘공’이 다섯 개에 불과하다. (개척교회) 담임목사로 ‘승진’한 대가를 치루는 중이다.
 
    그냥 맛있게 먹으면 되지, 뭘 그렇게 따지냐고 할까봐 언제나 속으로만 생각하는 것을 글로 표현하는 것뿐이다. 밥상머리에서는 늘 웃는다. 나도 그 정도 눈치와 배려심은 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그런 생각 없이 어떻게 예수를 따를 수 있을까, 싶은 것이다. 명절이 하나도 반갑지 않은 쓸쓸한 사람들의 존재를 더욱 의도적으로 상기하는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맛있는 거 안 먹겠다는 건 아니지만.)
 
    십 수 년 전에 읽은 책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탤런트 김혜자씨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당시 꽤 유명했던 책이다. 요즘 어린 사람들이 아는지 모르겠지만, 독실한 신자라는 김 씨의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다. 잊을 수 없는 대목은 이렇다. 기억에 의존하여 적어본다.
 
    “세상 사람들에게 내 눈을 빌려주고 싶습니다. 이 고통 받는 아이들을 보라고.”
 
    연예인으로서 화려한 생활을 하다 아프리카 봉사활동을 통해 만난 ‘신세계’에서, 그녀가 받은 거룩한 충격이 위와 같은 문장으로 정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아직도 그 말을 기억하고 있으니, 그녀는 아주 좋은 작가이기도 한 것 같다. 나는 독서를 하던 중, 그 문장을 주님의 강력한 음성으로도 받아들였었다. “현우야, 내 눈을 빌려주고 싶구나. 이 고통 받는 세상을 보라고.”
 
    내가 기독교 신앙을 ‘천국으로 이사 가는 것’으로만 알고 있던 학부생 시절, 그리고 복음을 ‘사적이고 은밀한 이야기’로 오해하고 있던 그 시절과 이별하고 하나님의 새로운 얼굴을 그리도록 도와 준 몇 권의 책들 중 하나라고 꼽을 수 있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추석이 되니 다시 떠오른다.
 
    신학교 입학 후 20년 가까이 지나오는 동안 예수를 믿는 방식, 하나님을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씩 바뀌었고, 그만큼 불편함도 커졌다. 내세에 천착하거나 역사적 현실과 전혀 무관한 뜬구름 잡는 설교들이 불편해졌고, 제도화된 종교에서 기득권을 탐하는 데 감히 신의 이름을 팔아먹는 것 같은 교활한 이들의 존재를 견딜 수 없었다. 무엇보다 예수께서 명하신 이웃 사랑은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 정도 베풀면 된다는 게 아니라, 세상을 전복시키는 성격일 수도 있다는 성서적 진실을 마주하는 만큼 고민도 커졌다. 그런 불편함과 고민의 크기에 도무지 보폭을 맞추어 따라오지 않는 내 평범한 일상이 너무나 부끄러운 죄의식도 덤으로 주어졌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 과거로 돌아가기는 틀렸다. ‘불편함, 고민, 죄의식’의 삼종세트는 이제 나의 가장 친한 벗이 되었다. 그 벗은 주님의 음성을 내게 늘 속삭인다. “현우야, 내 눈을 빌려주고 싶구나. 이 고통 받는 세상을 보라고.”
 
이런 절친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결코 절교하지 않으리라.
 
(그런데 추석을 앞두고 이렇게 비장해도 되나? 나 원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