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영도에 위치한 흰여울교회입니다.

신앙의 자리/믿음의 자리

<영적여정의 오솔길> 침묵의 농담

minkyo 2022. 12. 14. 11:33
주간 평화교회 117호| <영적여정의 오솔길> 침묵의 농담
 
 
1.
침묵기도학교를 진행하다보면 자주 듣는 말이 ‘침묵’에 대해서 설명을 해달라는 것이다. 침묵이라는 말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다. 침묵沈默은 잠길 침沈자에 잠잠할 묵默자를 써서 ‘아무 말도 없이 잠잠히 있음’, ‘정적이 흐름’, ‘어떤 일에 대하여 그 내용을 밝히지 아니하거나 비밀을 지킴’, ‘일의 진행 상태나 기계 따위가 멈춤’이라고 사전적으로 정의하고 있다. 침묵기도학교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이 정도의 의미를 몰라서 더 설명해달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침묵을 설명해달라는 말은 체험은 하지만, 그리고 더 깊은 체험을 원해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말로 설명해달라는 말이다.
 
2.
침묵은 일차원적인 것이다. 상황과 맥락, 그리고 의지에 따라서 침묵의 차원은 수없이 갈래를 짓고 있다. 우리는 일상 가운데 다양한 차원의 침묵을 체험한다. 외적인 침묵과 내적인 침묵, 강요된 침묵과 자발적 침묵, 수동공격으로써의 침묵과 방어적 침묵, 충만한 침묵과 텅빈 침묵, 의미를 넘어서는 침묵과 의미에 못미치는 침묵, 경이로써의 침묵과 피상적인 침묵, 행동 속에 깃든 침묵과 침묵 속에 깃든 행동 등등. 이런 다양한 차원의 침묵은 침묵의 농담濃淡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3.
그래서 침묵을 설명해달라는 말은 이런 다채로운 침묵의 농담을 모두 설명해 달라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를 더 깊어지게 인도하는 침묵의 차원에 대해서 말해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각자가 서 있는 자리가 다르기에 각자의 자리에서 더 깊어지는 침묵은 더욱 더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어진다. 마크 C. 테일러는 <침묵을 보다>라는 책 13쪽에서 침묵을 이렇게 표현한다.
 
4.
“침묵은 고요함이며 고요함은 침묵이다. 침묵은 소음이 없을 뿐 아니라, 모든 말의 소리와 메아리에서 들리고 울려 퍼지는 고요함이다. 침묵 없이는 말도 없으며, 말없이는 침묵도 없다. 침묵은 끝없이 후퇴하는 말의 지평이다. 침묵은 자신을 말하지 않으로써 말을 할 수 있다. 침묵을 듣는다는 것은 침묵을 배반하는 것이다. 듣지 않음으로써 듣는 것이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는 것이며,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드러내는 것이다. 말하지 말아라. 듣지 말아라. 드러내지 말아라. 말을 자극하는 정적은 언어가 타락한 탓이다.”
 
5.
침묵에 대한 설명을 요하는 정적은 ‘언어의 타락’이라고 한다. 언어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간극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그 간극을 만들고, 이어주고, 떨어트리고, 비틀며, 해체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 언어가 하나의 실체로 자리잡을 때 ‘언어의 타락’이 일어난다. 테일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6.
“침묵, 침묵의 불가능성, 신들은 인간처럼 때로는 말하고, 때로는 말하지 않는다. 신들은 때로는 말함으로써 침묵을 지키고, 침묵을 지킴으로써 말한다. ‘신은 어디에 있는가?’ 니체의 광인은 외쳤다. ‘내가 말해주겠다. 우리는 그를 죽였다. 당신과 내가 말이다. 우리는 모두 그를 죽인 살인자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우리가 신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은 침묵을 듣는 방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침묵을 듣는 것이 침묵을 더 침묵하게 만드는 것이었다면, 신의 죽음은 불가피한 것이다. 남아있는 의문은 다른 침묵, 좀 더 깊은 침묵, 침묵 너머의 침묵에 있어서,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고요함 속에서 그 침묵을 들울 수 있을 것인가다.”
 
7.
침묵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침묵을 어떻게 체험하고 있는가? 그리고 침묵을 어떻게 나누고 공유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첫 번째 언어인 침묵’을 우리는 어떻게 번역하거나, 번역할 수 있는가?
 
“성부 하나님은 한 말씀을 하신다. 그 말씀은 성부의 아들 성자이시며, 이 말씀을 성부는 영원한 침묵 속에서 영원히 말씀하신다. 따라서 영혼은 이 말씀을 듣기 위해 침묵해야 한다. - 십자가의 성요한”
 
어떻게?
​​
글쓴이: 김오성 목사 (한국샬렘영성훈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