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평화교회 118호| <생활성서> 기다림의 윤리학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고전 13:4, 새번역)
어느 날 아침, 유치원에 가려고 아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서너층을 내려가다 중간에 멈춰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할아버지 한 분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타셨다. ‘몸이 불편하신 분이로구나’ 하는 순간, 할아버지는 기습적으로 아들의 볼을 만지셨다. 검지로 ‘툭’ 건드리시는 정도였다. 나는 순간 당황했다. 요새는 그런 가벼운 터치도 ‘트렌드’에 맞지 않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함부로 만지지 마세요’라는 포스터였나, 플래카드였나. 하여간 그런 문구를 봤던 기억이 난다. 물론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어디 감히 내 아들을!’ 이라며 난리를 칠 이유까지는 없었다. 왜냐하면 할아버지 눈빛을 봤는데, 말 그대로 ‘예뻐 죽겠다’는 표정이셨다. 그리고 그 마음이 한편 이해가 되기도 했다. 우리 아들은 정말 귀염둥이니까.
아들을 데려다 주고 출근하는 길에 잠시 고민을 해보았다. 기분은 나쁘지 않지만, 동시에 당황스러웠던 것도 사실인 할아버지의 행동에 대하여. 그러다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 할아버지는 ‘터치’에 관한 최근의 윤리적 트렌드를 접할 기회가 없으셨을 수도 있겠구나”라고. 물론 시대적 분위기를 충분히 알면서도 ‘뭐 어때, 내 맘이야’ 라며 만지셨을 수도 있겠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아마 전자에 해당하실 만 한 인상으로 보였다. 인자한 느낌의 할아버지였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윤리적 트렌드와 감수성은 날로 바뀐다. ‘터치의 문제’는 하나의 예일 뿐이다. 우리는 모든 부분에서 그런 시대적 변화를 인지할 수 있을까? 한 개인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가? 가령 ‘터치’에 대해서는 매우 ‘진보적인’ 사람이 다른 부분에서는 완전히 ‘조선 시대’일 수도 있다. 그게 좋다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된다는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게 사람이다’ 라고. 그게 인간의 존재론적 현실이라고. 누구나,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는 없다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부적절한 행동에 대해서 곧장 화를 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일단 그 사람의 표정을 봐야 한다고.
내가 그 할아버지의 행동에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것은, 그 행동에 동의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무쪼록 그런 행동이 2022년에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그분이 이해할 기회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특정 주제에 대해 독서나 강연을 통해 ‘뭔가 깨달은 사람들’이, 자신의 깨달음의 속도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공격하는 모습이 과연 옳은 것일까, 라는 고민을 늘 하곤 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모든 걸 깨달은 성숙한 상태로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계기가 우리를 성숙하게 빚어갈 뿐이다. 그렇다면 나의 기준에 답답한 소리를 하는 사람에게도, 그런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못마땅하게 여기며 비난하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것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는다’는 바울의 말씀이 자꾸 생각나는 요즘이다. (나도 자꾸 ‘욱’ 하다 보니 반성하는 차원에서.)
글쓴이: 이현우 목사(자유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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