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평:상 74호] 무중력세대 | 한국교회 기독청년들이 떠나고 있다
한국교회 기독청년들이 떠나고 있다
(본 글은 한국기독교사회발전협회에서 주최한 “포럼카이로스#11”에서 발표한 발제문을 수정보완한 글입니다.)
한국교회, 기독청년이 떠나고 있다. 아니 이미 많은 기독청년들이 떠났다. 구태여 구체적인 통계를 근거로 들지 않더라도, 당장 출석하는 교회에 청년부가 조직되어있는지, 조직되어 있다면 청년들의 숫자는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본다면, 기독청년들이 한국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시게 될 것이다. 혹자들은 이를 인구감소에 따른 자연적인 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인구가 감소하니 자연스레 교회 안에 청년세대도 줄어든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는 합리적인 추론이다. 한국사회 현재 OECD 국가 중에 가장 낮은 출생률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추세가 계속 된다면, 교회의 고령화는 지금보다 더 심각해질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교회 내 청년의 감소원인을 인구감소로만 돌릴 수 없다. 2019년에 목회데이터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 10년 사이에 30대 이하의 청년학생들의 개신교 이탈비율이 상당히 높다는 결과가 나왔는데, 2012년에 교회를 다닌 경험을 가진 비개신교 대학생의 비율이14%였던데 반해, 5년이 지난 후 2017년에는 30%로 배 이상이 늘어났음을 볼 수 있다. 코로나시기를 지나며 이 수치는 더욱 늘어났을 거라 추측된다. 이를 근거로 한다면, 단순히 인구감소가 교회 내 청년숫자의 감소의 원인이 아니며,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다른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나안 대학생, 즉 신앙은 가지고 있지만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대학생의 비율이 28%로, 성인 23%의 비율보다 높게 나타난 것도 이를 뒷받침 한다.
한국교회 내 청년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이제는 누구나 공감하는 문제이다. 오늘날 청년들은 자신의 피곤하고 바쁜 일상을 투자해서라도 교회에 다녀야할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교회가 매력이 있고, 위로를 받는 곳이고, 삶의 도전과 신앙의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곳이라면, 아무리 일상이 지치고 피곤해도 교회를 다니겠지만, 지금 교회는 청년들에게 그러한 위로와 도전, 만족을 주지 못하고 있다. “다시 본질로 돌아가자.”, “회개하자”등의 구호만으로는 교회를 떠나고 있는 청년들을 붙잡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미 한국교회는 수년간 그러한 구호를 외쳐왔다. 하지만 해가 지날수록 기독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현실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 한국교회에 청년들이 떠나는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1) 먼저 오늘날 MZ세대라 명명되는 청년세대에 대한 분석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청년세대의 문화, 그들의 소리를 듣는 것에서부터 우리는 한국교회 출구의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 그리고MZ세대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구체적인 통계자료를 통해서, 청년들이 한국교회를 떠나는 구체적이 원인에 관해서 살펴봐야 한다. 3) 이러 과정을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한국교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찾을 있을 것이다.
MZ세대의 삶
미디어에서 MZ세대라는 단어들이 많이 들린다. MZ세대는 밀레니엄세대와 Z세대를 합친 말로서, 1980년에서 1994년 사이에 출생한 M세대는 2021년 기준 10,617,024명으로 전체 인구의 약 21%를 차지하고 있으며, 1995년에서 2004년 사이에 출생한 Z세대는 2021년 기준6,104,552명으로 전체 인구의 약 11%를 차지하고 있다. 이 두 세대를 합치면, 전체 대한민국 인구비율에서 총 32% 이상을 점하게 된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출생한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있는 연령대로 사실상 하나의 집단으로 묶는 것은 무리가 있다. 1980년대 생과 2000년대 생, 삼촌과 조카뻘인데 어떻게 한 세대로 묶을 수가 있겠는가? 90년대, 2000년대 생들은 이러한 세대구분을 기성세대의 일방적인 대상화라고 여기며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대연구 관점에서 이러한 구분은 충분히 이뤄질 수 있다고 본다. MZ세대를 동일한 하나의 집단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이항대립 속에서 기성세대의 관점에서 바라본 젊은 세대라고 이해하면, 오해를 좀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MZ세대는 기성세대와는 상대적으로 매우 다양한 하위집단을 가지고 있다. 이질적 집단이 많이 모여 구성된 세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기성세대와 달리 빠른 사회변동 속에서 세대주기가 짧고 자산분포에 따른 다양한 계층이 존재하기 때문인데, 기성세대가 대체적으로 동질적인 생애주기를 공유하며 공통적인 경험을 해왔다면(6.25전쟁, 산업화, 민주화 등등), MZ세대는 선택의 영역이 확장되어 동세대인들과 비슷한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들었고 이로 인해 다양한 경험에 기반 한 집단, 계층이 뭉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기성세대와 구분되는 MZ세대의 구체적인 특징은 무엇일까? MZ세대는 정보통신기술의 발전과 함께 자연스럽게 성장하여, 인간관계 형성 및 유지측면에서 인터넷, 가상공간의 활용이 많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공동체 의식이 강한 기성세대가 중요시 여겼던 의리, 정, 연줄 등의 개념은 희박해졌으며, 오히려 그것이 공정하지 못한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더불어 MZ세대는 ‘88만원세대’를 정체성으로 받아드린다. 즉, 경제적 박탈감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는 세대라는 것인데, 이들은 부모인 베이비붐세대의 높은 교육열로 높은 교육수준을 갖추고, 한국사회의 풍요 속에서 자랐지만, 성인이 된 후 경험한 한국사회는 절망적이고 암울했던 것이다. 기성세대가 한국사회의 경제적 성장과 궤를 같이하여 계층상승을 경험했다면, MZ세대는 IMF 이후 저성장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계층상승의 경험을 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MZ세대의 정치문화 역시 독특하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 분단, 민주화운동 등 굵직한 역사적 시절을 경험한 기성세대의 관점에서는 낮아진 학생운동에 대한 관심과 참여도 낮은 청년층 투표율을 근거로 MZ세대가 정치에 무관심한 세대라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 기성정치의 시각에서는 청년들의 정치활동이 인지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청년들은 사실 광우병 촛불집회, 박근혜 퇴진운동 등 한국사회의 굵직한 정치적 사건들에 참여해왔으며, 일상 속에서 다양한 정치적 이슈에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적인 방식과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했다. 차이가 있다면, 기성세대가 “국가 전체의 방향을 좌우하는 거대담론”에 더 관심을 가졌다면 MZ세대는 ‘나’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이슈에 좀 더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다는 점이다. 이번 대선도 그런 경향이 짙었다. 청년세대가 주목한 이슈는 민주화니, 통일이니, 이념이 아니라 실제 자신들의 삶의 자리와 연루되어있는 정책들, 이슈들에 큰 관심을 가졌으며, 정치적으로 움직였다. 한편 직장과 일상을 침범 받지 않으면서 정치활동을 할 수 있다는 실용주의적인 효율성을 강조하는 것도 MZ세대의 특징이다. 결론적으로 MZ세대의 정치는 일상의 정치화, 정치의 일상화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MZ세대에 관한 분석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세대주기가 짧고 다양한 계층이 존재하는 만큼, 다양한 하위집단과 문화를 가지고 있다.
2) 인간관계 형성에 있어서 가상공간 활용이 많으며, 피상적인 관계 맺음 속에서 공동체의식이 약하다.
3) 의리, 정, 연줄 같은 기성세대의 문화에 반감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공정하지 못한 것으로 여긴다.
4) 경제적 박탈감을 심각하게 느끼는 세대이며, 계층 상승의 경험이 기성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
5) 거대담론이 아닌 자신의 삶과 직결된 정치적 이슈에 관심을 보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즉, 정치의 일상화, 일상의 정치화를 추구한다.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
앞선 2019년에 목회데이터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청년들이 개신교를 이탈하는 이유에 관해 다음과 순위로 결과가 나타났다.
① 신앙생활에 회의(38%) ② 교회의 비도덕적인 모습(25%) ③ 교회 밖에 대해 지나치게 배타적(24%) ④ 헌금강요(18%) ⑤ 교인/목회자 실망(17%) ⑥ 율법적/ 강압적(15%) ⑦ 기독교 의심하는 사람에게 우호적이 않음(11%) ⑨ 권위주의적/비 민주주의적(10%).
MZ세대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이러한 통계에 근거한다면, 우리는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청년들은 다원화 된 사회적 정황을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배타적인 모습으로 타종교와 비 신앙인들을 바라보는 교회에 실망하여 떠난다. 교회는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세상에 대한 닫힌 시선, 타종교에 배타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다양한 하위집단과 문화 속에서 다원화 된 사회를 자연스럽게 경험해온 청년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답답하고 폐쇄적인 느낌을 주게 되는 것이다.
더불어 청년들은 권위적인 구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강압적인 문화, 절대적 순종을 강요하는 문화, 비민주적인 문화를 지닌 교회에 실망하여 떠난다. 탈권위적 시대를 살아온 청년들은 딱딱한 교회문화, 권위적이고 순종을 강요하는 교회문화에 지쳐 떠나는 것이다.
청년들은 메시지에 실망하여 떠난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성공의 메시지, 기복신앙의 메시지는 경제적 박탈감을 경험한 청년세대에게 만족 주지 못한다. 한국사회의 경제적 성장 시기에, 계층상승을 경험하고, 실제적인 삶의 변화를 경험한 기성세대와는 달리, 경제적인 박탈감을 느끼고 있으며, 계층상승의 경험을 하지 못한 청년들에게 기복신앙적인 메시지, 성공을 지향하는 메시지는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청년들이 자신들의 삶과 직결된 정치적인 이슈 등에 관심을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서의 메시지도, 당위적인 메시지가 아닌 현실적인, 삶과 긴밀하게 연결된 메시지에 귀를 기울인다.
청년들은 목회자의 윤리적, 도덕적 일탈에 실망하여 떠난다. 최근 들어 목회자의 윤리적 일탈이 표면화 되고 있다. 정보화시대 이전에는 교회 내 윤리적인 문제들이 수면아래 있었지만, 인터넷의 발전, 인터넷 언론의 발전으로 교회 안에 윤리적인 문제들이 수면위로 올라오고 있다. 언론도 목회자의 일탈을 자극적으로 기사화시키기도 한다. 부분적인 문제가 전체의 문제인 것처럼 포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심심치 않게 목회자들의 일탈문제가 붉어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전부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깨끗해야할 종교인들이 일탈을 일삼는 것은 매우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특별히 교회 내 성폭력 문제는 여성주의에 대한 관심이 커진 시대 속에서 청년들에게 더욱 큰 실망을 안겨준다. 성폭력 문제 자체도 심각하지만, 이를 쉬쉬하는 분위기, 그냥 덮는 분위기, 오히려 피해자들을 탓하는 분위기들이 더욱 심각한 문제이다. 교회의 성인지감수성에 관해 심각하게 고민을 해봐야한다. 또한 세습 문제 역시도 공정을 중요시 하는 청년세대에 매우 큰 실망을 주고 있으며, 교회를 떠나게 하는 중요한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교회의 사유화, 공정하지 못한 인사처리에 염증을 느껴 떠나는 것이다.
비민주적인 교회와 교단의 구조 또한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데 한 몫을 한다. 21세기교회연구소가 전국 19~39세 기독 청년 700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설문조사에서 청년 2명 중 1명 이상, 53%가 교회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는 교회를 건강하고 바람직하게 바꿔나가는 일에 청년들이 참여하고 싶다는 것이다. 중장년층 남성들이 독점하고 있는 의사결정구조 안에서는 교회 안에 다양한 구성원들의 목소리는 적극적으로 수렴되기 어렵다. 또한 교회 안에 여러 의제들과 시대적 과제들을 전체 구성원들이 공감하는 방식으로 풀어내는데도 한계가 있다. 이러한 비 민주주의적 구조에 실망하여 청년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다.
이밖에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구체적인 이유를 열거한다면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할 것은 이러한 개별적인 문제들 아니라, 한국교회가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갱신 가능한 조직인가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갱신이 가능하고, 여전히 희망이 있는 조직이라면, 기독청년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청년들이 함께하는 한국교회를 향하여
그러면 어떻게 한국교회의 출구를 마련할까? 청년들이 함께하는 한국교회를 만들기 위해 교회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사실 답은 단순하다. 위에 언급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다.
먼저 한국교회가 힘을 빼야 한다. 권위를 내려놓는 것이다. 필자는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은 “세속화”라고 생각한다.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세속화”라는 단어로 인해,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 있지만, 여기서 긍정적인 세속화의 의미를 생각했다.
철학자 아감벤은 세속화 예찬이라는 책에서 세속화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일단 세속화되고 나면 사용할 수 없고 분리되어 있었던 것이 그 아우라를 상실한 채 [공통의] 사용으로 되돌려진다. 이 둘 모두 정치적 작업이다. 환속화가 권력의 실행을 성스러운 모델로 데려감으로써 권력의 실행을 보증한다면 세속화는 권력의 장치들을 비활성화하며 권력이 장악했던 공간을 공통의 사용으로 되돌린다.
세속화는 교회를 세상의 가치로 오염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다. 봉헌된 것, 그래서 더는 경험할 수 없고, 다가설 수 없는 성스러운 것들을 공통의 사용으로 돌려놓는 것을 말한다. 교리, 전통, 예수, 하나님, 성경 등 교회 안에서 성스럽게 여겨지는 것들이 많이 있다. 이것은 확실한 것들이고, 특별한 것들이고, 권위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분리의 기제가 되곤 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더는 수정될 수 없고, 활용될 수 없고, 인용될 수 없는 신성화된 것들을 우리는 마음껏 가지고 놀 수는 없을까? 불순하다고 여겼던 것 주제들이 교회 안에서 대화의 주제가 되고,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들을 교회 안에서 시도해보고, 무겁고, 권위적이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주제를 가지고 교회 안에서 격하게 토론도 한 번 해보는 것이다. 이제는 그만 좀 진지하고, 근엄하고, 권위적이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힘을 빼는 것이다. 박물관 화 된 기독교, 그래서 볼 수는 있어도, 직접 만질 수는 없고, 경험할 수없는 박물관 화 된 공간을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청년들이 추구하는 교회가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교회는 메시지의 개혁이 필요하다. 한국사회의 경제성장 시기에 선포되던 기복신앙적인 메시지는 저조한 경제성장시기에 경제적 박탈감을 느끼는 청년세대에게는 설득을 갖지 못한다. 기독교신앙과 청년들의 현실적인 삶 사이에서의 구체적인 메시지들이 선포되어야 한다. 기독교신앙의 내용이 어떻게 내 삶에 연결되어 있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하는지 청년들은 궁금해 한다. 더불어 단선화 된 메시지가 아닌 다양한 메시지들의 선포되어야 하는데, 이는 다양한 하위집단을 가지고, 동세대간에도 다양한 문화를 지니고 있는 청년들의 삶의 정황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한국교회가 대형화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작지만 다양한 교회들이 생겨 날 때 가능한 일(교단의 적극적인 작은 교회 살리기 제도 마련)이다. 다양한 관심사와 다양한 삶의 정황 속에 있는 청년들은 단선적인 메시지 아래 모이지 않는다. 제 각각의 삶과 연루되고, 관심사가 반영되는 교회들을 청년들이 찾아가는 것이다. 깊은 종교적 예전을 추구하는 교회, 성도간의 교제와 수평적인 교회 구조를 추구하는 교회, 진보적인 교회, 보수적인 교회, 애견도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교회, 환경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교회, 사회복지를 추구하는 교회, 신학적 탐구를 추구하는 교회 등등 작지만 다양한 형태의 교회들이 세워지고, 유지되고, 성장할 수 있는 한국교회 토양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교회가 청년들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목회자의 윤리적 일탈을 제대로 치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특별히 교회 내 성폭력 문제는 한국교회의 부실한 치리 시스템을 보여준다. 교회에 덕이 안 된다고 하면서 수면 아래로 숨기려는 모습들, 성범죄 문제를 되도록 교회 안에서 좋게 마무리하려 태도들 그리고 교단 차원에서 강력하게 치리하지 못하는 안이한 상황은 목회자의 성범죄 문제를 더욱 키우게 된다. 기본적으로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한, 성인지 교육이 중요하다. 이것이 목회안수 과정에서도 필수적으로 들어가야 한다. 성범죄 목회자에 대한 강력한 치리 시스템도 정비해야 한다. 또한 이 문제를 교회 내부적인 문제, 교단 내부적인 문제로만 해결하려고 들지 말고, 외부전문단체와의 제휴를 통해서 자문을 구하면서, 전문적인 문제해결을 도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비민주적인 교회와 교단의 구조를 바꾸는 일도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개방적인 교회공동체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방적인 교회공동체는 단순히 청년들, 여성들이 의견 정도만 제시할 수는 공동체가 아니라, 실제 이들의 의사결정권을 보장해주는 온전히 열린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다양한 세대가 교회의 의사결정권에 참여할 수 있도록 교회법을 개정해야하며, 다양한 세대가 교단총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세대별 총대 쿼터제와 같은 제도를 시행해야 한다. 혹은 총회 청년자문단을 두어, 교단 안에 여러 의제들에 청년들의 의견이 수렴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글을 마무리하며
영화 매트릭스에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길을 아는 것과 그 길을 걷는 것은 다르다”한국교회는 지금까지 길을 알아가는 데 주목했다. 솔직히 말해, 청년들의 교회이탈 문제를 다루는 글들은 많다. 세미나도, 포럼도 많이 열렸다. 문제에 대한 진단은 넘쳐난다. 한국교회는 나름대로의 해법을 알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길은 알지만, 길을 걷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적인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말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의 길을 찾고, 걷는 여정을 실제로 걸어갈 뜻있는 이들이 움직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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