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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말씀 :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신 90:10)
어느 날 아들에게 책을 읽어주는데 ‘꼬부랑 할머니’(?)가 사진으로 실려 있었습니다. 어느 농촌 마을 풍경을 다룬 책이었는데요. 그 할머니는 깊게 패인 주름투성이로 마당에 쭈구리고 앉아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주름의 개수와 깊이가 놀라울 정도였습니다만 그래도 밝은 표정으로 즐겁게 일하시는 모습에 포근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문제는 제 아들이었는데요. 아들은 많이 놀란 것 같았습니다. 그런 할머니는 처음이었거든요. 아들이 항상 할머니, 하고 부르며 매일 만나는 분은 금년에 막 환갑이 되신, (요즘에는 할머니로 안 쳐주는?) 그런 분입니다. 사진 속 꼬부랑 할머니에 비하면 청춘인 셈이죠. 그래서 그런지 아들은 매우 낯설어 했습니다. 그러더니 제게 묻더군요. “이 할머니는 몇 살이야?” 저는 잠깐 생각하고, “80살 정도 되신 것 같아”라고 답했습니다. 이어지는 대화는 자연스레 ‘나이’에 대한 것으로 흘러갔는데요. 몇 마디 주고받다가 아들은 끝내 눈물을 보였습니다. “그럼 우리 할머니 100살 되면 죽어?” 라며 말입니다. 제 아들은 이제 여섯 살입니다.
나이에 대한 대화는 사실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몇 달 전부터 아들은 그 주제에 관심을 보였었고, 그런 상황 속에서 자연스레 ‘천국’에 대해서 말해주기도 했습니다. (신학적으로 온전한 설명은 아니겠지만 편의상) 사람이 나중에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설명했던 것이죠. 저는 아들이 그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꼬부랑 할머니 사진 보다가 결국 눈물을 보이는 모습을 보면서 당황이 되기도 하고, 슬퍼하는 아들의 마음이 안타깝기도 하고, 그 와중에 너무 귀여워서 얼른 휴대폰 동영상 버튼을 눌러 울먹이는 모습을 찍기도 했습니다.
사실 저는 아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합니다. 아직 마흔도 되지 않았는데, 요즘 들어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이 하나, 둘 떠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의도적으로 직면하곤 합니다. 상상을 해 보면, 이상한 기분이 확 몰려오는 것입니다. “응? 울 엄마가 세상에 없다고? 아빠가? 그 친구가?” 그것이 지금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가정해 보면, 정말 기분이 이상한데요. 영원히 제 곁에 있을 것 같은 그 사람이 순간 사라져 버리는 일. 당연한 말이지만, 결코 기분이 좋을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찝찝해만 한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지요.
저는 죽음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려고 합니다. ‘내일도 살아있을 거라는 건 착각’이라고 말입니다. 새롭지도, 비상하지도 않은 깨달음입니다만 저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종종 이 착각에 빠져 살지 않는지요? 얼마 전 토크쇼를 보다가 ‘유느님’이 하셨단 말이 기억납니다. “저는 평소에 죽음에 대해 잘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사실 보통 사람들의 마음일 겁니다. 하지만 바로 그 착각에서 빠져나오는 것의 유익이 적지 않아 보입니다. 내일도 살아있을 것이 착각인데, 우리가 뭐 하러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할까요? 내일도 살아있을 것이 착각인데, 우리가 뭐 하러 가난한 사람의 숨통을 꽉 틀어막을까요? 내일도 살아있을 것이 착각인데, 우리가 뭐 하러 전쟁을 일으킬까요? 이 모든 것이, 이 착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결과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영원히 살 것 같은 착각 때문에 매 순간을 지옥으로 만드는 어리석음의 경연장 같기도 합니다.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에게 제 나이를 슬쩍 공개하자면 어느 ‘당 대표’와 동갑입니다. 배우 송중기씨와도 동갑이지요. 저는 그렇게 아직 젊습니다. 하지만 어젯밤 주차장에서 만난 지팡이 짚고 느릿느릿 걸어가시는 할아버지가 얼마 뒤 제 모습이라는 걸 잊지 않겠습니다. 젊음은 찰나와 같고, 제 생명은 하나님의 손짓 하나에 언제든 날아가 버릴 수 있는 연약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날마다 상기하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가령 제 후배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혹은 저보다 약해 보이는 그 사람을 없는 사람 취급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순간 그런 우에 빠지더라도, “아, 내가 이러면 안 되지” 라고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가 우리 생명의 주인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기독교인일진대, 내일도 살아있을 거라는 착각에서 빠져나오는 의식적 훈련을 하면 좋겠습니다.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나라를 이루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직은 제 코끝에 숨이 붙어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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