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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자리/신학마당

기다림의 이름

minkyo 2022. 4. 5. 20:36
주간 평화교회 98호| <신약따라걷기> 기다림의 이름

 

    그리스도교의 여러 개신교 교단 중 감리교는 그 명칭의 유래가 독특하다. 영국에서 생겨난 감리교의 신자를 가리키는 영어단어는 Methodist인데, 이 단어는 짐작대로 method와 관련되어 ‘방법을 따르는 사람’ 또는 ‘규칙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감리교인이 이렇게 불리게 된 까닭은 창시자 존 웨슬리가 옥스퍼드 대학에서 강의하던 시절 활동했던 신성회(Holy Club)와 관련이 있다. 활발한 사회선교도 실천했던 신성회의 멤버들은 지나치게 열성적이고 규칙적이며 철저했던 경건생활로 인해 주위로부터 질시와 조롱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대표적인 조롱의 말이 바로 methodist였다. 조롱의 의미였기에 methodist는 ‘규율을 잘 따르는 사람’ 같은 긍정적이거나 중립적인 의미로서가 아니라 ‘규칙쟁이’처럼 비하의 어감으로 사용되었던 말이었다. 바로 이 규칙쟁이(methodist)라는 조롱의 말을 훗날 성공회로부터 분리된 감리교회가 자신의 이름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명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는 언제 생긴 단어일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익숙하기에 그 말은 원래부터 있었던 말처럼 생각되기 쉽다. 하지만 유대교로부터 갈라져 나온 신흥종교의 추종자를 가리키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처음부터 있었을 리는 없다. 누군가 다소 이상하게 보이는 이 소종파의 무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처음 불렀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1세기 이방인으로서 이 신흥종교의 이름을 처음 짓는다고 가정해 본다면, 이 소종파의 무리들을 가리키는 말로는 ‘그리스도인’ 말고 더 적절해 보이는 다른 명칭들도 존재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한국의 여러 교단들이 교단명에 넣어 사용하는 ‘예수교’처럼 이 종교의 근원이 되는 창시자 예수의 이름과 함께 ‘예수교인’ 또는 ‘예수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리스도인보다 더 적절하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예수인이 아니라 결국 그리스도인라고 불리게 되었고, 그리스도교는 예수교가 아니라 그리스도교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명칭의 유래에 대해 사도행전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바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다소로 가서 그를 만나 안디옥으로 데려왔다. 두 사람은 일 년 동안 줄곧 거기에 머물면서 교회에서 모임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제자들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었다.”(행 11:25-26)

    중동과 지중해를 잇는 시리아의 수도 안디옥은 로마제국 내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로 경제와 군사의 중심지였다. 안디옥은 유대 땅에 임한 박해로 흩어진 신자들이 최초로 이방인 지역에 교회를 세운 도시이기도 했으며, 제국의 대도시로서 초대교회의 중심지이자 이방 선교의 전초기지가 된 곳이었다. 바울이 처음 선교를 시작한 곳도 바로 이 안디옥이었다. 이곳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그리스도인’(Χριστιανός, 크리스티아노스)이라는 단어는 전체 신약성경에서 단 세 차례(행11:26, 행 26:28, 벧전4:16) 등장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명칭으로 ‘불리었다’는 사실은 제자들 스스로가 자기들을 그렇게 불렀던 것이 아니라 바깥사람들이 그들을 그렇게 불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이 새로운 명칭의 부여는 이제부터는 이방인들조차 유대인들과 비유대인들이 섞여 있는 이 신흥종교를 자신들이 알고 있는 유대교와는 다른 종류의 종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잘 알다시피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의 헬라어 번역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메시아인’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교 역시 메시아교와 같은 말이 된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교를 메시아인과 메시아교로 바꾸어 부르면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든다. 메시아교라면 마치 그리스도교의 이단적 분파나 시한부종말론을 신봉하는 광신도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인상이 처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로 제자들을 불렀던 사람들의 의도와 태도였을 것이다. 안디옥에서 근 일 년 간 이들을 지켜본 이방인들의 눈에 이들은 다소 괴이하게 보였을 것이 틀림없다. 이들은 일주일마다 모여 창시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고 하고, 모일 때마다 ‘마라나 타’를 외치며 죽었다가 살아나 하늘로 올라갔다는 그들 종파의 창시자가 다시 내려오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무리들은 자신들의 구원자가 다시 내려오는 날 온 세상이 종말을 맞는다는 종말론자들이다. 심지어 그 종말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떠들고 다닌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은 분명 이런 정황 속에서 나온 별명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 역시 지성과 자부심으로 충만했던 옥스퍼드 사람들이 웨슬리 무리들을 조롱하며 사용했던 메소디스트(Methodist)처럼 조롱의 의미를 담은 부정적인 별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메시아 광신자’와 동일한 의미로 쓰인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말은 메소디스트가 교단을 가리키는 말이 된 것처럼 마침내 거대한 세계종교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이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 결코 우연일 리 없다. 어쩌면 이 이름의 발생 역시 하나님의 섭리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 조롱의 의미로 붙여졌을 이 이름은 결과적으로 지금 우리의 신앙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말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즉 메시아인이다. ‘메시아’라는 유대 민족의 구원자 개념이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간 작은 종파 이름의 뿌리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적인 태도를 결정해준다. 마치 유대인들이 이 땅에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며 자신의 신앙과 삶을 바로 세우고 있는 것처럼, 메시아인들인 우리 역시 이 땅에 다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메시아 대망(待望) 속에 살아가며 우리의 신앙과 삶을 점검하고 바로 세우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아가 ‘오실 이’인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메시아는 ‘오실 이’이다. 이것은 처음 그리스도인들에게뿐 아니라 이천 년이 흐른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성경은 여러 차례 예수님을 오실 메시아로 소개한다. 예를 들어 세례 요한은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면서 예수께 묻는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 11:3)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 메시아에 대한 논쟁을 벌이며 말한다.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압니다. 그가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요 4:25) 그리고 히브리서의 기자는 구약성경을 인용하며 이미 한 번 오셨던 메시아를 다시 오실 메시아를 연결시킨다. “이제 아주 조금만 있으면 오실 분이 오실 것이요 지체하지 않으실 것이다.”(히 10:37) 결정적으로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을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분”(계 1:4.8; 4:8)으로 소개한다. 흥미롭게도 ‘오실 이’에서 ‘오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분사는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이다. 그러니까 ‘오실 메시아’는 ‘오시는 메시아’이시기도 한 것이다.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께서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에서 직접 하신 약속인 “내가 곧 가겠다.”(계 22:20)이 동사 역시 헬라어 원문에는 현재형 동사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니 본문은 이렇게도 읽힐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빠르게 가고 있다.” ‘오실 메시아’가 미래의 어느 한 시점을 뜻하는 말처럼 들리는 것에 비해 ‘오시는 메시아’는 지금 현재에도 뚜벅뚜벅 우리를 향해 걸어오시는 메시아라는 말처럼 들린다. 어쩌면 다시 오시겠다 약속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한 걸음 한 걸음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시는 중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란 말 자체가 메시아 예수를 뜻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늘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변화산의 제자들처럼 여기가 좋다고 안주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긴장 사이에서 내세(來世), 즉 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이다. 기다림의 긴장은 이미 우리의 이름 속에 새겨져 있다. 우리의 이름 그리스도인은 기다림의 이름과 다름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