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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자리/신학마당

회개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minkyo 2022. 4. 5. 20:35
[웹진 평:상 69호] 평.보.성 | 회개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누가복음 13:1~9)

 

1 바로 그 때에 몇몇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었다는 사실을 예수께 일러드렸다. 

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3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4 또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져서 치여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5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6 예수께서는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다가 무화과나무를 한 그루 심었는데, 그 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하고 왔으나, 찾지 못하였다. 

7 그래서 그는 포도원지기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내가 세 해나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하고 왔으나, 열매를 본 적이 없다. 찍어 버려라. 무엇 때문에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 그러자 포도원지기가 그에게 말하였다. '주인님,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9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

 

지금 보내는 사순절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는 단연코 '회개'가 아닌가 싶습니다. 평소 여러분은 '회개'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에게 몇몇 사람이 찾아옵니다. 갑자기 그들은 실제 예루살렘을 관리하는 로마 총독 빌라도가 행했던 일에 대해서 예수님에게 전하기 시작하죠. "바로 그 때에 몇몇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였다는 사실을 예수께 일러드렸다."(1절) 예수님에게 질문을 했던 이 사람들의 기본 전제는, 갈릴리 사람들이 당한 학살이 무언가 갈릴리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을 것이라는 미신 같은 것이 깔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제 유대인들은 누군가가 병에 걸리거나 죽게 되었을 때, 그것을 단순한 사건으로 보지 않고 누군가의 죄 때문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었죠.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를 단박에 알아차리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2~3절) 뭔가 더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런 변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고 대답하십니다. 잘못이 있고 없고, 혹은 회개를 하고 안하고는 우리가 당하는 변이나 사건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 우리가 어떤 변을 당하든 당하지 않든, 우리 모두는 모두 똑같이 회개가 필요한 죄인입니다. 더 큰 죄인 덜 큰 죄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자신의 죄와 잘못을 회개하지 않았기에 당한 변이라는 태도. 갈릴리 사람들이 그렇게 피를 흘린 걸 보니 그들은 엄청 심각하고 큰 죄인이라는 태도. 이 모든 태도가 바로 오늘날 회개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를 잘 폭로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관계에서 빈번히 찾아볼 수 있는 가스라이팅이 이와 같죠. 아주 명확하게 잘못한 사람이 있는데도,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을 잘못을 한 당사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교묘히 돌리는 시도 말입니다. '너가 강하게 거부를 했어야 했어. 너가 부족해서 그렇게 당하는거야' 등등의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피해를 당한 이들에게 쏟아내고 있습니다. 지금껏 우리가 타인에게 당당하게 외쳐왔던 회개는 결국 참된 회개를 빙자한 가스라이팅이었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어 예수님은 말씀하시죠. "또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져서 치여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4~5절) 우리는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더 많이 죄를 짓고, 더 조금 죄를 짓고를 판단합니까? 단지 많은 사람들이 그걸 다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는 다수의 원리에 휩싸여서 남의 잘못을 판가름하기도 하구요. 인간인 우리가 본능적으로 느끼기에 뭔가 불결하고 더럽다고 느끼는 이유로 그걸 더 큰 죄라고 판단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다 헛된 판단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잘못도 없다고 스스로 느끼는 너희조차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한다고 하십니다.

 

이제 더 이상 열매를 맺지 않아 가망이 없어져 버린 무화과나무를 이제는 찍어 없애버리려는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아라, 내가 세 해나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하고 왔으나, 열매를 본 적이 없다. 찍어 버려라. 무엇 때문에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7절) 주인이 무화과나무를 대하는 태도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타인에게 회개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미지와 일맥상통합니다. 가망이 없는 무화과나무를 그렇게 대하듯, 내 기준으로 가망이 없어보이는 타인을 그렇게 대합니다.

 

근데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주인은 포도원을 가지고 있고, 주인이 무화과나무를 심은 곳은 바로 그 포도원이라는 것입니다. 포도원에는 포도나무를 심어야 하죠. 이미 포도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으니까 포도원이구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이미 나무의 차이 만큼이나 그 식생이 다를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유독 잘 자라는 특징을 가진 땅이 있는가 하면, 무화과나무가 잘 자라는 특징을 가진 땅도 존재하겠구요. 그런데 무화과나무가 심겨진 곳이 이미 포도원이었다는 것은, 이 무화과나무가 당연히 잘 자랄 수 없는 조건이었다는 것입니다. 근데 주인은 지가 무화과나무가 잘 자랄 수 없는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어놓고서는,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을 무화과나무 탓을 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무화과나무가 잘 자라는 곳에 심었다면 이런 일도 없을 것입니다. 이게 바로 아까 앞전에 말했던 가스라이팅입니다.

 

포도원지기는 주인의 태도와 다릅니다. 포도원지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님,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8~9절) 포도원지기는 당장에라도 찍어버려야 한다며, 너가 서 있는 땅만 버리겠다고 그렇게 무화과나무를 비난하고 혐오하는 주인과는 다르게, 이 무화과나무에는 충분한 돌봄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무화과나무에는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는 충분한 돌봄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되살려야 할 '회개'에 대한 올바른 태도입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회개라는 단어에는, 남의 잘못을 들추고 남의 죄를 비난하고 정죄하고 혐오하며, 마치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가망이 없다는 식으로 취급하는 이미지가 덕지덕지 끼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회개는 그런 이미지가 아닙니다. 회개는 우리에게 주어진 따뜻하고 온유한 기회입니다. 가망이 없다며 무심하게 주인에게 내쳐질 위기를 당한 무화과나무를, 포도원지기가 다시 희망을 주며 환대하고 돌봄을 시작하듯이, 우리의 포도원지기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언제나 다시 기회를 주시며 다시 우리를 돌보시고 다시 우리를 환대하시며 그렇게 우리를 맞이하십니다.

 

글쓴이 : 박형순 목사(희망교회/평화교회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