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합니다.
이 짧은 한마디는 적어도 우리에게 세 가지 사실을 알려 줍니다.
일단 하나님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인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입니다.
나 한 사람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만일 장소적인 개념이면 하나님은 하늘에만 계시고 땅이나 바다에는 계시지 않은 분이 되는데 그럴 수는 없습니다.
결국 “하늘”은 장소가 아니라 능력이나 영광, 권위, 위엄을 땅과 대조하여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땅의 아버지도 물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사랑의 규모가 다릅니다.
땅의 아버지는 온전하지 못하지만 하늘 아버지는 온전하십니다.
하물며 능력은 아예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영원성에서 차이가 납니다.
그다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서, “우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나라 말로는 이런 부분에 대한 설명이 애매합니다.
가령 “이 분이 제 아버지입니다”를 영어로 하면 “This is my father”입니다.
그런데 “This is my father”를 우리말로 옮기면 “이 사람이 우리 아버지입니다”가 됩니다.
우리말에는 1인칭 복수의 형태를 갖는 표현이 많습니다.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우리 집, 우리 애인… 전부 다 그렇습니다.
영어로 하면 our가 아니라 my인데 우리말로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에서 말하는 “우리 아버지”는 정말로 “우리 아버지”입니다.
말 그대로 our Father입니다.
하나님은 공유적인 하나님입니다.
나한테만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이 공유적인 분이라는 얘기는, 일단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비이기적이어야 한다는 말과 연결됩니다.
여러 명이 모여서 식사를 하는데 전부 다 속으로 “하나님, 제가 제일 많이 먹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하면 하나님도 참 난처한 일입니다.
그다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마치 아버지 같은 친근함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주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그래, 맞다. 네가 바로 내 아들이다” 하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같은 맥락으로 “하나님, 제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는 가슴 벅찬 감격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야 합니다.
어떤 부잣집에 양자로 입양된 고아가 있다고 하십시다.
어제까지만 해도 고아원의 천덕꾸러기였는데 하루아침에 부잣집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자기에게 찾아온 엄청난 행운이 미덥지 않아서 혹시 꿈이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자기 볼을 꼬집어보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지간해서는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자기를 입양해 준 사람에게 “아빠!”라고 불러보면 됩니다.
“아빠”라고 불러서 “응”하고 대답하면 자기가 정말로 그 집 아들이 맞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마다 그런 것을 느껴야 합니다.
“내가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로구나” 하는 가슴 들뜬 희열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우리가 어느 만큼 감격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만 국한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하여 감격해야 하는 만큼 하나님께도 우리와 연결된 부분이 있게 마련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생계를 책임질 의무가 있습니다.
“아빠”하고 불렀을 때 “응”하고 대답한 사람은 그 아이를 양육할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셨다는 얘기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책임지기로 작정하셨다는 뜻입니다.
양자로 입양된 고아가 자기를 입양해 준 사람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으로 자기의 신분을 확인했으면 그다음에는 변화된 신분에 어울리는 변화된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만 우리를 양육할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자녀답게 자라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한 채로 살아가려면 굳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육신은 이 세상에 속하여 살고 있을지라도 하늘에 속한 사람처럼 살아야 하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부잣집에 입양된 고아는 일단 깡통을 버려야 합니다.
고아원에 있을 적에는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아빠”를 부를 때마다 자기에게 있는 부잣집 아들과 동떨어진 모습을 하나하나 버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마다 혹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에 부족한 모습은 없는지 늘 확인해야 합니다.
결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진짜 자기에게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이 있는지 더듬어 보고 혹시 하나님의 자녀라 칭함 받기에 부족한 모습이 있으면 그때마다 팔을 찍어내고 눈알을 뽑아내는 심정으로 그것을 하나씩 제거하려는 비장한 각오가 있어야 비로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닿는 기도- 강학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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