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평:상 74호] 평.보.성 | 십자가의 피로 이루어진 평화 (골로새서 1:19~22)
십자가의 피로 이루어진 평화
골로새서 1:19~22
19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안에 모든 충만함을 머무르게 하시기를 기뻐하시고,
20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자기와 기꺼이 화해시켰습니다.
21 전에 여러분은 악한 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고,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22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그분의 육신의 몸으로 여러분과 화해하셔서, 여러분을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자기 앞에 내세우셨습니다.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신 구원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해주는 아주 귀한 표현입니다.
십자가의 피로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그것을 '화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자신들의 악한 일로 인해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인간과의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취하신 방식이 다름아닌 '화해'였다는 것을 바울은 말합니다. 이 부분이 우리가 오늘 주목해야 할 지점입니다.
보통 화해라는 것은 서로간의 과실로 인해 서로 책임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 인정을 하며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사전에서도 '싸움하던 것을 멈추고 서로 가지고 있던 안 좋은 감정을 풀어 없앰'이라고 정의하고 있죠.
만약 일방적으로 잘못한 사람이 있을 때, 그 관계에서 필요한 것은 서로간의 화해가 아니라 잘못한 이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잘못의 경중에 따라서는 법적으로 징벌도 받아야 하구요. 용서를 하고 안하고는 당한 이의 자유입니다. 설령 용서를 했어도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구요. 그러니까 화해의 의무도 없습니다. 화해라는 것은 서로가 어느 정도 관계를 회복하고 더 잘 지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인데, 나에게 잘못한 이에게 억지로 관계를 이어나가는 건 힘든 일이죠.
근데 바울은 말하길, 전적으로 우리가 악한 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 관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화해를 하셨다고 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것이 전적인 우리의 잘못이라면, 통상적으로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말 그대로 우리의 전적인 잘못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응당의 징벌을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우리와 '화해'를 이루십니다.
다시 말하지만, 화해라는 것은 서로간의 관계의 깨어짐에 대해서 일방적인 누군가의 책임이 아니라 서로에게 각자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행위입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죄를 묻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나님 자신에게도 이 관계의 깨어짐에 책임이 있는 듯한 느낌으로 화해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그분의 육신으로 우리와 화해하셨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인간이 져야 할 잘못의 책임을 하나님도 함께 지시겠다는 표현인 것이죠. 적어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화해를 위한 하나님의 책임으로 승화시켜서 읽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적어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인간들을 그들의 악한 일로 정죄하고 처벌하는 것보다, 인간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누가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나를 가리는 것'보다, '우리의 관계는 다시 회복되어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제국은 십자가를 인간의 죄를 처벌하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를 인간과의 평화를 이루시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제국은 예수에게 없던 죄까지 뒤집어 씌우면서 그에게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 무고하게 흘려진 피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평화의 길들은 실로 다양합니다. 어떤 경우는 모두가 쉬쉬하며 덮어버리려는 죄와 불의가 있는 힘껏 폭로되고 드러나는 것으로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또 어떤 경우는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함께 책임을 지며 관계가 다시 연결되는 것에 몰두하는 방식으로도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이렇게 입체적이고 교차적인 관계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화해'의 방식으로 평화를 이루는 길도 명징하게 우리 앞에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의 정죄를 멈추고, 누가 얼마나 더 잘못했는지 시시비비를 가리기를 그치며, 옳고 그름만을 따지기를 내려놓아야 평화가 찾아오는 관계도 확실히 존재합니다. 더욱이 우리가 관계 속에서 겪는 다양한 갈등들은 대개 각자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 존재하는 것들이니까요. 일방적으로 잘못한 우리와도 화해하신 분이 우리가 따르는 하나님이지 않습니까? 서로의 사정과 상황을 이해하고, 이 관계 속에서 나에게 부여된 책임을 인식하며, 관계가 더욱 깊어짐으로 지속 가능할 수 있도록 세워가는 것. 그것이 화해하심으로서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신 그분을 따라 우리도 함께 갈 수 있는 평화의 길입니다.
글쓴이: 박형순 목사 (희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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