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평화교회 119호| <신약따라걷기> 천국의 열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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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믿음의 쌍방성, 믿음의 상호성에 대해 말하면서 A. J. 크로닌의 소설 『천국의 열쇠』의 한 장면을 예로 든 적이 있다. 무신론자인 친구의 죽음을 앞에 둔 치점 신부의 안타까운 작별의 말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믿음을 넘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믿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 속 대목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쌍방적 믿음과 관련하여 독자를 깊은 성찰로 이끄는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기는 하나 이것이 전체 소설의 중심 주제는 아니다. 소설의 주제는 한 마디로 ‘관용’이다. 寬容이라는 한자어가 ‘너그럽게 용서하고 받아들임’이라는 뜻이기에 우리는 관용이라는 말을 내가 누군가를 봐주거나 용서해준다는 시혜적인 의미로 이해할 때가 많다. 하지만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이 관용이라는 개념은 그런 시혜적인 의미와는 사뭇 다르다. 서구 사상에서 관용의 정신은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1694~1778)에게로 소급된다. 볼테르의 말로 알려진 다음의 격언은 아마도 관용의 정신을 가장 잘 대표하는 말일 것이다. “나는 당신의 말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권리를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다.” 실제로 이 말은 볼테르가 직접 한 말이 아니라 전기 작가의 글에서 유래된 말이지만 볼테르의 사상을 가장 잘 대변하는 말이기에 지금도 볼테르의 말로 자주 인용되곤 한다. 볼테르가 말한 관용의 원래 프랑스어 단어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톨레랑스(tolérance)다. 톨레랑스는 너그럽게 용서한다는 한자어 관용(寬容)과 의미의 방향이 완전히 다르다. 같은 뜻을 지닌 영어 tolerance처럼 톨레랑스의 본질적 의미는 ‘싫은 것을 참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용의 대상이 되는 것은 너그럽게 받아들일 만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싫고 참을 수 없는 것이다.싫고 참기 어렵지만 그 대상을 혐오하고 모욕하고 배제하지 않고 기어코 참아내는 것, 이것이 바로 관용의 본질인 것이다. 결국 볼테르의 인용 중 “나는 당신의 말에 찬성하지는 않지만”이라는 부분에 관용의 모든 성격을 결정하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싫지만 참는 것, 이것야말로 모든 관용의 출발점이며 지향점이다.
이러한 관용의 개념은 그리스도교 사랑의 성격을 집중적으로 다룬 바 있는 사도 바울의 사랑론에도 새로운 빛을 던져준다. 흔히 ‘사랑장’이라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은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라는 말로 시작하여 다음 구절에서 그 절정을 맞는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고전 13:4-7) 사랑의 성격에 대해 매우 다양한 요소들이 다수로 나열되어 있기에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에 관한 모든 요소들을 소개할 때 ‘사랑은 오래 참고’가 가장 먼저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놀랍게도 바울 역시 사랑의 시작을 ‘싫은 것을 참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결코 우연일 리 없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사랑할 만한 자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마 5:46)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무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는 명령에 덧붙여진 말씀이었다. 그러니 그리스도교 사랑도 출발은 싫은 것을 참는 것, 즉 관용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국의 열쇠』는 이 관용이라는 주제를 일관되게 밀어붙이는 소설이다. 가톨릭과 개신교라는, 신앙의 전통이 완전히 다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주인공 치점의 이야기는 역사 속에서 전쟁까지 불사했던 두 신앙 전통 간의 관용을 한 축으로 삼는다. 하지만 소설 속의 관용은 단지 그리스도교 내의 관용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볼테르의 경구를 삶의 모토로 삼고 있었던 불신자 친구 탈록과 함께 관용이라는 주제는 신자와 불신자의 관계로까지 넘어가며, 중국의 선교 이야기를 통해서는 그리스도교와 타 종교로까지 확장된다. 그러다가 소설은 마침내 타 종교와 철학에 대한 관용을 바탕으로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을까에 대한 가능성까지 살펴보려는 것처럼 보인다.과연 다른 종교에도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그 길로 통하는 문이 존재할 수 있을까? 물론 『천국의 열쇠』는 끝까지 개종하지 않았던 치점의 오랜 중국인 벗이 천국에 이르는 길은 많겠지만 나 또한 당신이 가는 길로 가고 싶다고 고백한 후 치점에게 세례를 받는 장면을 묘사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소설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에 이르는 길이 여러 갈래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소설의 진지한 탐구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사실 이 탐구의 암시는 소설의 제목 속에 이미 들어 있었다. 『천국의 열쇠』의 영어 원제목이 ‘The Keys of the Kingdom’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Keys’다. 영어 제목에서 열쇠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 즉 ‘열쇠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원 제목에 대한 직역은 “천국의 열쇠”가 아니라 “천국의 열쇠들”이어야 한다. 천국의 열쇠들이라니, 이것은 마치 천국에 이르는 열쇠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의미처럼 들린다.
소설이 제목으로 삼은 ‘천국의 열쇠’는 당연히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방에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에서 따온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 16:19) 새번역을 포함한 우리말 성경 대부분에는 이 ‘열쇠’가 단수이니 열쇠는 하나뿐이다. 그렇다면 ‘열쇠들’은 작가의 의도 내지는 상상력이었을까? 타 종교에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실험해보기 위해 의도적으로 성경의 표현을 변주한 작가의 상상력? 그러나 놀랍게도 이것은 작가의 상상력이 아니다. 우리말 성경번역이 단어를 정확하게 번역하지 못 한 것이기 때문이다. 헬라어 원문에는 ‘열쇠’에 해당하는 단어 κλεῖδας(클레이다스)가 분명하게 ‘열쇠들’을 뜻하는 복수형태로 되어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외국어 성경들은 이 열쇠를 원문에 맞춰 ‘열쇠들’로 번역한다. 영어 역시 ‘천국의 열쇠’를 ‘The Keys of the Kingdom of Heaven’으로 번역하면서 열쇠의 복수형을 분명하게 반영한다. 우리말 성경만 유감스럽게도 이 복수형을 살리지 않고 단수형으로 바꾸어 번역한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이 제목으로 삼은 ‘The Keys of the Kingdom’은 소설의 저자인 크로닌이 제목을 변경한 것이 아니라 원래 영어 성경의 표현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크로닌은 이 열쇠가 복수형이라는 사실에 의미를 두고 주목했으며, 이를 단초로 자신의 신앙 소설 안에서 신학적인 상상력을 전개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천국에 이르는 하나의 열쇠가 아니라 여러 열쇠들을 주셨다. 천국의 열쇠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각각의 열쇠마다 해당하는 문이 존재할 것인데, 이 문들이 이어지는 천국은 오직 한 길이며 그 길로 가는 중간 중간마다 여러 문들이 존재하는 것일까? 마치 통과해야 하는 관문처럼? 아니면 소설이 사색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천국으로 가는 다양한 길과 문들을 만드신 것일까? 여러 문들이 반드시 여러 종교들을 의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여러 문들은 천국으로 이르는 다양한 믿음의 형태들을 가리킬 수도 있을 것이고, 다양한 공동체의 신앙을 가리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단 하나의 열쇠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의 신앙에 뜻밖의 위로와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만일 길이 단 하나 뿐이라면 내가 가는 길이 과연 옳은지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 내내 함께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길이 여럿이라면 비록 내가 가는 길이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설사 흔들리고 모호하며 불안하더라도 결국 어떻게든 천국에 이르는 문을 통과하여 하나님께로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천국의 많은 열쇠들은 우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해놓으신 위로의 수단일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길로 천국에 이를 수 있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일 것이다.
글쓴이: 이진경 교수 (협성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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