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평:상 73호] 평.보.성 |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 (골로새서 1:9~12)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 (골로새서 1:9~12)
9 그러므로 우리가 여러분의 소식을 들은 그 날부터, 우리도 여러분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 주시기를 빕니다.
10 여러분이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고,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점점 더 알고,
11 하나님의 영광의 권능에서 오는 모든 능력으로 강하게 되어서,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기를 바랍니다.
12 그리하여 성도들이 받을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여러분에게 주신 아버지께, 여러분이 빛 속에서 감사를 드리게 되기를 우리는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데요. 첫째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이고. 둘째는 그 은혜에 대해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화답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10절에서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제안하죠. 여러분이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10절).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 우리에게는 하나님에게 합당하게 살아가야 할 삶의 응답이 남았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뜻하지 않은 암초를 만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분명히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삶의 응답을 하려고 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많은 이들 중에는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은 채 그저 제자리 걸음을 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들의 신앙 생활은 멈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하신 말씀을 연상해 보면 쉽습니다. 은혜의 씨앗이 심어졌지만 사람들에게 밟혀 바로 죽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이 다니는 길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죠. 분명 은혜를 받았지만 어떠한 삶의 변화도 없이 여전히 육체의 본능에만 충실한 삶을 계속 유지하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뿌리가 내리는 가 싶더니 너무 단단해서 뿌리가 내리지 못하고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단단한 돌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죠. 이 모습은 갈라디아 교회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연상해보면 쉬울 것 같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그보다 더 단단했던 그들의 민족성 혹은 종교심은 결국 다시 율법과 규율, 할례로 돌아가게 했죠. 심지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강요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하나님께 합당한 삶으로 보답하지 않고 그저 눈에 보이는 예배 생활이나 종교 생활에만 몰두하는 경우가 이에 속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짐을 남에게 부과하기를 좋아하죠. 마지막으로는 어느 정도 뿌리를 내려 줄기가 올라오다가 멈춰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알고보니 가시덤불도 같이 자란 마음을 가진 사람이죠. 분명 마음 속에는 하고자 하는 열정도 있고 의지도 있지만, 그보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근심과 걱정, 두려움과 공포가 더 큰 나머지 온전히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삶입니다.
은혜의 씨앗이 자라서 열매를 맺기까지는 결국 우리의 마음 밭이 어떠하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늘 이렇게 고백하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이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할 땅은, 우리의 '마음 밭'이라는 땅입니다. 우리의 마음 밭이 씨가 뿌리 내리고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좋은 땅으로 경작되는 일이 최우선입니다.
바울도 이 점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골로새 교회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을 한껏 칭찬해주었던 바울이지만, 오늘 우리가 만난 본문에서는 힘을 주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러분의 소식을 들은 그 날부터, 우리도 여러분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 주시기를 빕니다.(9절). 이미 은혜를 받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었음에도, 바울은 그 사실 자체에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바로 그 날부터, 그들을 위해 쉬지 않고 이렇게 기도한다고 하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 주시기를 빈다고 말이죠.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라 쉬지 않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바울의 말에는, 너희들도 쉬지 않고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알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은혜를 받게 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총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고자 하는 삶을 멈추게 된다면 결국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죠.
은혜를 받았음에도 왜 아무런 변화도 없이 육체의 본능에만 충실한 사람이 생겨날까요? 은혜를 받았음에도 왜 유대 그리스도인들처럼 완고한 사람이 생겨날까요? 은혜를 받았음에도 왜 세상의 두려움과 공포에 의해 열매를 맺지 못한 사람이 생길까요? 몰라서 그런 겁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채워지는 삶을 살려고 하지 않아서이죠. 바울은 이미 그의 삶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멈춰 버린 사람들을 너무 많이 겪었을 겁니다. 분명 전해진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은혜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그래서 이제 믿음과 사랑을 따라 자유롭게 살아가면 되는데, 어느 순간에서 그대로 멈춰버린 많은 이들을 바울은 많이 경험했을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 필사의 마음으로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겁니다. 그들은 그 은혜에서만 멈춰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어주시는 지혜와 총명을 가지고 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기를 원했던 겁니다. 그런 그의 마음이 "우리도 여러분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그의 절절한 고백을 통해 만져지는 거죠.
우리는 이미 충분히 하나님을 알아왔고 누려왔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차오르기도 합니다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야 할 세계가 우리 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더욱이 잘못되고 왜곡되고 편향된 지식을 아주 쉽게 습득할 수 있는 정보 과잉의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시대의 위기는 지식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편협하고 편향된 생각을 가진 누군가에 의해 잘못 해석되어진 정보를 우리는 진리라고 받아들입니다. 혐오와 배제를 부추기고, 다른 생각과 다른 성향을 가진 이들을 쉽게 차별하며, 타인을 악마화하는 것으로 자신이 진리라고 여기는 것을 수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의 기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그것들을 올바르게 분별하게 해 달라고 말이죠. 자기 사상과 성향, 혹은 누군가의 편견과 고정관념에 근거한 분별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총명에 근거한 분별력이 바로 오늘날 지식 과잉의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 분별력으로 가짜 뉴스와 편향되어버린 정보들, 거짓 지식들을 분별해내는 능력이 바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능력입니다.
글쓴이: 박형순 목사 (희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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