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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우울함으로 마주한 이태원 참사

minkyo 2022. 12. 14. 11:31
[웹진 평:상 76호] 무중력세대 | 깊은 우울함으로 마주한 이태원 참사
 
깊은 우울함으로 마주한 이태원 참사
*본 글은 새가정 12월호에 기고한 글을 수정보완한 글입니다.
 
마치 8년 전 봄 같다. 우리는 그때 몹시 아팠고, 지금 또 몹시 아프다. 다시는 이런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설마 또 다시 이런 감정을 느끼리라고 생각하지도 못했고. 어느 죽음이 안타깝지 않겠냐마는 못다 핀 꽃, 채 열매 맺지 못한 청춘의 죽음은 기독청년활동가인 나에게 더할 수 없는 비통함으로, 우울함으로 다가온다. 
 
지난 10월 29일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동의 작은 골목에서 핼러윈 축제를 즐기려던 수많은 청년이 압사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5.5평의 작은 공간에 병목현상이 일어나 행인끼리 우왕좌왕하며 서로 뒤엉키는 일이 발생했는데, 이 상황에서 벌어진 ‘연쇄 깔림’이 직접적인 사고의 원인이었다. 더불어 수많은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되었는데 불구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정부의 안이한 대처도 참사의 간접적인 원인이었다. 한밤에 일어난 대참사 소식에 놀란 시민들은 밤을 설치며 빠른 구조와 수습을 기도했지만, 들려온 것은 156명이 희생되었고 197명이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이었다.
 
갑작스러운 참사 소식을 들을 때면 종교인으로서 깊은 우울감에 빠진다. 종교인에게 우울이라니 불손한 것 같지만, 종교인이라고 뭐가 크게 다르지 않다. 죽음 앞에서 나도 한없는 무력감과 우울함을 느끼는 한명의 인간이다. 준비된 죽음이라면 그나마 견딜 만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갑작스런 죽음은 더 깊은 종교적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허망한 죽음 앞에서 기독교 신앙은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저 죽음에 무슨 신앙적인 의미 같은 것들이 있단 말인가? 회의감 가득한 질문의 끝에 내가 도달하는 결론은 우리는 죽음의 이유를 알 수 없으며, 삶은 언제든 죽음으로 미끄러질 수 있다는 것, 삶에는 늘 죽음이 근접해 있다는 것이다. 의식이 무의식을 전제로 하고, 정상이 예외를 전제로 하듯, 삶은 죽음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그러한 무의식과 예외, 죽음은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깊은 심연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섣불리 이태원 참사에 대해 말할 수 없으며, 의미를 부여할 수도 없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귀신들의 축제를 즐기려다 죽었다느니, 이번 일을 계기로 핼러윈 축제가 건전하고 거룩한 축제가 되어야 한다느니 하는 희생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죽음에 대한 성찰 없는 목사들의 가벼운 언사들이 들린다.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 
 
요한복음 9장에는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고치신 예수의 이야기가 나온다.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 목사는 <메시지 성경>에서 이 이야기를 인상적으로 번역한다.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물었다. "랍비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부모 때문입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탓할 사람을 찾으려고 하니, 너희의 질문이 잘못되었다. 이 일에 그런 식의 인과관계는 없다. 차라리 너희는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 주목해보아라."
 
이 이야기는 입이 근질근질한 종교인들에게 엄중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태원 참사와 같은 죽음에 신의 뜻이니, 죄의 결과니 하는 종교적 이유 따위는 없다고. 언제든 죽음으로 미끄러질 수 있는 삶의 한복판에 우리는 그저 던져져 있을 뿐이라고. 하여 죽음에 이런저런 종교적 이유를 덧붙이지 말고, 그것이 무엇이 됐든 그저 묵묵히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희생자들이 하나님 품에 안식할 수 있도록 마음 모아 애도하며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일이든, 다시는 참사가 벌어지지 않도록 철저한 진상규명을 외치며 정부를 압박하는 일이든 말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적어도 공감 능력을 상실한 신앙인은 되지 않는 것, 입만 살아있는 신앙인은 되지 않는 것이다.  
 
깊은 우울함으로 이태원 참사와 마주하며 더불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죽음이 있다. 노동과 복지의 제도적 공백 속에서 경제적 고립으로, 생존의 문제로, 관계의 단절로 죽음을 선택하는 청년들과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죽어가는 비정규직 청년노동자들이다. 죽음의 양상은 다르지만, 정부, 그리고 우리사회의 무책임한 방관 속에서 죽었다는 점에서 이 모든 죽음이 다르지 않다. 아직 우리사회는 갈 길이 멀다. 안타깝다. 우리시대 청년들을 위해 지금 교회는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으며, 무엇을 구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가? 묻고 또 물어야 할 때이다. 찹찹한 심경으로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