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시험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종교에서는 시험 자체를 없애려고 고행을 하기도 하는데 그런 방법으로 시험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 호흡이 있는 이상 시험은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에게는 식욕이 없는데 그것은 고귀한 수준이 아니라 오히려 병리적인 현상입니다.
식욕을 갖고 있는 채로 자기가 그것을 컨트롤해야 건강한 것입니다.
예수와 석가의 가장 큰 차이가 헤어스타일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림이나 사진에서 석가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머리 모양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중들은 전부 다 머리를 밀었는데 석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처음에 석가가 곱슬머리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석가는 본래 인도 사람이고, 그렇게 심한 곱슬머리는 아프리카라면 모를까 인도에는 없습니다.
나중에 알았는데 곱슬머리가 아니고 그것이 전부 다 달팽이라는 것입니다.
석가가 진짜로 머리에 달팽이를 붙이고 다닌 것이 아니라 아무리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명상을 해도 머리에서는 온갖 상념이 떠나지를 않는다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다 너그럽습니다.
그래서 혈기를 부리고서도 태연하게 “원래 성격이 그런 것을 어떻게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그것도 성격이 못되어서 그렇다고 안하고 성격이 급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자기 책임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급한 성격”의 주인이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스려야 할 책임도 당연히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흔히 들을 수 있는 말 중에 “사람 얌전하다고 만만히 보지 마. 나도 성질 있어!”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마치 성질이 있는 것을 자랑인 양 얘기하는데, 이것은 결코 자랑일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질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품이면 그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그런 성품이 없었는데 예수를 믿고 나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런 성품을 소유하게 되었으면 당연히 길이 보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예수를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청산하지 못한 구습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 성질은 빨리 버려야 합니다.
자기에게 성질이 있다는 사실을 남에게 과시할 것이 아니라 얼른 숨겨야 합니다.
사람들의 논리가 죄에 오염되어 있다 보니 부끄러운 것과 자랑할 것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는 단적인 예입니다.
그러면 나에게는 무엇이 문제인지 각자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집이 문제일 수도 있고, 자존심이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혈기가 문제일 수도 있고, 걸핏하면 토라지는 것이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시험에 이겨야 한다고 하면 너무 거창한 것 같습니다만 이렇게 자기 주변에서부터 하나씩 점검하고, 거기에 넘어지지 않는 것부터 연습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시험에 이기는 것은 힘들고 지는 것이 오히려 재미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시험 중의 하나가 요셉이 보디발 부인에게 받은 시험일 것입니다.
이때 요셉이 시험에 이기는 것이 재미있었겠습니까, 지는 것이 재미있었겠습니까?
시험에 넘어가기로 작정하면 힘들 일이 없습니다.
이때 요셉이 시험에 넘어갔으면 주인마님의 귀여움을 받으면서 좋은 음식 먹고 좋은 옷 입고 마냥 즐겁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험에 이기려니 주인마님의 미움도 받아야 하고 옥에도 들어가야 했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히 11:24-25)
“죄악의 낙”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죄에는 즐거움이 따릅니다.
우리가 죄에 노출되기 쉬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즐겁고 이기는 것은 힘이 듭니다.
죄를 지을수록 괴롭고 죄에 이길수록 즐거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실상은 그 반대입니다.
닭에게 모이를 주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닭을 치는 사람이 닭에게 모이를 주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어서 많이 먹고 훌륭하게 자라라는 뜻으로 모이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모이를 먹여서 포동포동 살을 찌운 다음에 잡아먹기 위한 것입니다.
모이를 쪼는 닭은 아무 것도 모르고 열심히 모이만 쫓아다니고 있겠지만 모이를 주는 사람은 어쩌면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이 그렇습니다.
죄에 둔감한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그것이 즐겁습니다.
그리고 그 즐거움이 쌓이고 쌓이면 돼지가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것처럼 결국 제 갈 길로 갈 것입니다.
<하늘에 닿는 기도- 강학종 목사> p156~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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