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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자리/신학마당

무엇을 따를지, 누구를 따를지

minkyo 2022. 2. 10. 18:19
[웹진 평:상 63호] 평.보.성 | 무엇을 따를지, 누구를 따를지

본문: 요한복음 6:56~69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4)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공생애 사역 동안에 가장 큰 위기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인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해서 심지어는 예수님 본인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할 정도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끊임없이 빵을 요구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했기 때문에 앞으로 자신들의 굶주림을 예수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없을 만한 소리를 하기 시작하십니다. 자기 자신이 빵이라고 하질 않으시나,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질 않으시나, 자신의 살과 자신의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고 하질 않으시나, 군중들의 기준에서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을 만한 이야기만을 하실 뿐입니다. 결국 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하나 둘씩 떠나가게 되죠.

 

예수님을 떠난 이들은 예수님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라는 말에 문제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빵 따위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따라갔던 이유는 오직 하나, 내가 먹고 내 배가 부를 수 있는 빵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who, 즉 예수님이 누구인지, 지금 자신이 따라가는 저 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관심은 없었습니다. 저들에게 관심은 what, 즉 저 사람이 주는 게 무엇인지, 저 사람을 따르면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에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끝까지 남은 12제자들은 좀 달랐습니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알았습니다.”(68~69절) 베드로의 반문이 말해주고 있듯이, 그들이 제자로서 따랐던 것은 ‘무엇’이 아니라 ‘누구’였습니다. 그들이 따랐던 것은 바로 영생의 말씀이 있는 예수님,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떠나지 않고 끝까지 남았던 이유였죠. 예수님에게서 무엇이 보여지나 보여지지 않나,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얻지 못하는가, 이런 문제는 이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다는 이유로, 정확히 말해 자신들이 원하는 말씀이 아니라는 이유로 떠났습니다. 한때 예수의 그 권위 있는 말씀으로 따랐을 텐데 말이죠. 그러나 12제자들에게는 적어도 이 순간에는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자체를 이미 영생의 말씀으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떠나간 제자들은 말씀을 어떤 특정한 ‘what’으로 이해했지만, 남아있는 제자들은 말씀을 예수 자체로 즉 ‘who’로 인식했습니다.

 

우리가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게 될 때, 내 이름을 제외하고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들을 생각해보면, 사실상 거의 다 ‘그 무엇’에 관한 내용들입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아무개입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일은 무엇입니다. 좋아하는 일은 무엇이고 앞으로의 희망은 무엇입니다.” ‘나는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 앞에 우리는 자주 ‘나는 무엇인지’라는 대답으로 반응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끌어안기를 좋아합니다. 자연에 있을 때 평화를 느끼구요. 갈등 상황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마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타인을 이해하는 우리의 인식틀도 ‘그 사람은 진정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인 부분보다는 ‘그 사람은 나에게 무엇인가?’라는 기능적인 차원으로만 여기기도 합니다. 나의 무엇과 타인의 무엇이 서로 맞을 때는 이해타산을 추구하는 관계가 되기도 하지만, 그 둘이 반대될 때는 혐오와 배제가 시작됩니다. 우리가 가늠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존재는 훨씬 존귀하고 존엄한데, 단 몇 단어의 ‘무엇’으로 타인의 존재가 설명이 가능하다고 여깁니다.

 

저 예수가 그때 줬던 그 빵, 그 물고기, 그 무엇들, 그러나 그것들은 예수가 아닙니다. 그저 일시적인 무엇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무엇들에 너무 깊게 자신을 투영합니다. 그 일시적인 무엇에 너무 심하게 자기 정체화를 합니다. 그것을 욕망하고 그것을 바라는 것이 곧 나 자체이며, 그것을 이루고야 마는 것이 내 인생의 중요한 가치가 되어버립니다. 자신을 제자라고 굳게 믿는 이들조차 진정 예수라는 참 스승이자 참 인간이자 참 하나님을 따르기보다, 그 분이 나에게 줬어야 마땅할 그 무언가를 따르기만 합니다. 그것은 때로 자본의 모습으로, 부동산의 모습으로, 건물의 모습으로, 권력의 모습으로 그들 눈앞에 나타납니다. 그것들을 당당하게 추구하는 삶도 예수를 따르는 것이라는 근거 없는 당당함을 심어줍니다.

 

그들이 따랐던 것과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이 서로 다를 때, 자신이 따랐던 것을 과감히 버려두고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그 분의 삶 그 분의 나라를 새로이 따를 수 있을런지요. 우리 앞에 다양한 모습으로 이런 상황에 직면합니다. 내가 마땅히 추구해왔던 그 무엇이 알고 보니 하나님 나라에 그리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을 때 말입니다. 내가 합당한 이유로 혐오하고 배제했던 그 사람이 알고보니 예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의 대상이었을 때 말입니다.

 

근심하며 떠났던 부자 청년처럼, 기대가 박살나서 떠나가버린 무리들처럼, 자신의 ‘무엇들’을 공고히 지키기 위해 외면하고 떠나는 길도 있습니다만, 예수를 ‘누구’로 기억하고 그 분과 영원히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이들의 길도 분명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따를까요, ‘누구’를 따를까요.

 

글쓴이 : 박형순 목사(희망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