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후 성전에서 여러 차례 치열한 논쟁을 벌이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각각의 논쟁은 상대와 주제가 각기 달랐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예수께서는 대제사장들, 율법학자들, 장로들과는 세례 요한을 예시로 든 ‘권위’에 대한 논쟁을(막 11:27-12:12),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당원들과는 카이사르에게 바치는 세금을 두고 ‘정치적 입장’에 대한 논쟁을(막 12:13-17), 사두개파 사람들과는 부활이라는 ‘신학적’ 논쟁을(막 12:18-27) 벌이신다. 모든 논쟁을 끝내고 예수께서 친히 이 모든 논쟁에 대한 요약과 결론을 내리시는 장면이 바로 이어지는 한 율법학자와의 대화이다.(막 12:28-34) 이 율법학자는 매우 특이한 인물이다. 율법학자들에 대해 언제나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신 예수께서 유일하게 호감을 가지고 대하신 인물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하나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는 엄청난 칭찬을 듣는다. 신명기와 레위기의 말씀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요약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러나 바로 이 요약을 예수님은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라는 대전제로 시작하신다. 특별하게도 오직 마가복음만 그렇게 전한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이 대전제 없이 “네 마음을 다하고...”라는 구절로 바로 답변을 시작하시고, 누가복음에서 예수님 대신 이 대답을 한 율법학자 역시 “네 마음을 다하고...”라는 구절로 바로 답변을 시작한다. 정치, 경제, 종교 등 삶에 있어 벌어질 법한 모든 논쟁에 대해 예수께서 직접 내리신 결론의 시작은 바로 신명기 6:4-5, 즉 ‘쉐마 이스라엘’(=들으라, 이스라엘)의 시작이었다. “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주님, 즉 야웨(=여호와)는 우리의 신이다. 야웨는 한 분이시다. 바로 이 결정적 문장을 예수께서는 모든 결론에 앞세우신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출 20:3)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신명기의 선언은 십계명의 우상 숭배 계명과 연결된다. 이 구절을 새번역 성경이 원문에는 없는 ‘섬긴다’는 말을 넣어 의역한 것은 매우 적절한 번역으로 보인다. 저 선언은 이 세상에 신이란 야웨 신 한 분뿐이라는 유일신론(monotheism)에 대한 선언이 아니라, 여러 신들 가운데 나는 이 신만을 섬기겠다는 일신숭배론(monolatry)에 대한 선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않겠다는 고백은 우상을 하나님과 함께 겸하여 섬기지 않겠다는 고백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해석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 6:24) 십계명 속에서 이 일신숭배론, 즉 혼합주의에 대한 경고는 곧바로 우상 숭배의 금지로 이어진다.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출 20:4)
지금 우리에게 우상 숭배란 무엇일까? 손 없는 날을 피해 이사날짜를 잡거나, 사주를 보는 일일까?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돈을 섬기는 물신숭배? 아마도 우리는 이런 것들을 우상 숭배의 범주에 넣어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상 숭배를 일차원적으로만 이해하면서 우상 숭배의 진정한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이 된다. 우상 숭배의 무섭고도 비밀스런 메커니즘은 바로 자기기만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우상 숭배를 하면서도 우리 자신이 우상 숭배를 하고 있는 줄 모른다. 스스로 속이면서도 속고 있는 줄 모른다. 이게 무슨 말일까? 실제로는 우상을 믿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우상 숭배의 무서운 본질이다.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 십계명의 돌판을 받을 때 산 아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은 바로 이 본질에 대한 예시이다.
모세의 오랜 부재에 불안을 느낀 백성들은 아론에게 금송아지를 만들어줄 것을 요구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이 요구한 것은 금송아지가 아니라 ‘신’이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출 32:1) 그리고 아론이 그들을 위해 송아지 상을 만들자 백성들은 외친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출 32:4) 그리고 아론은 선포한다. “내일 주님의 절기를 지킵시다.”(출 32:5) 이튿날 그들은 번제와 화목제를 바치고 축제를 벌인다. 눈치 채셨는가? 그들은 금송아지를 다른 신의 이름으로 부른 것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이 신은 다른 신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야웨였다. 그들은 이 금송아지를 자신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야웨 하나님으로 고백한 것이다. 본문에서 ‘신’이라고 우리말로 구별 지어 번역한 히브리어는 ‘엘로힘’, 즉 하나님이다. 또한 ‘주님의 절기’라고 번역한 히브리어는 명백하게 ‘야웨의 절기’로 원문에 나타나 있다. 그러니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라는 구절은 “이스라엘아! 이 하나님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하나님이다.”로 번역하는 것이, “내일 주님의 절기를 지킵시다.”라는 구절은 “내일 야웨의 절기를 지킵시다.”로 번역하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더 적절하다. 결국 이들이 만든 것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이 아니라 자신들이 섬기고 있는 바로 그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우상 숭배는 다른 신에 대한 숭배가 아니라 나를 위해 내가 만든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이다.
이 우상 숭배의 역사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계속되었다. 솔로몬 사후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열 지파를 약속 받아 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로보암은 자신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마음을 뺏길까 염려되어 금송아지 두 개를 만들어 베델과 단에 세운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일은 너희에게는 너무 번거로운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를 이집트에서 구해 주신 신(=엘로힘, 즉 하나님)이 여기에 계신다.”(왕상 12:28) 그 역시 우상을 다른 신이 아니라 야웨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다른 신이 아니라 야웨 하나님을 섬긴다고 스스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십계명의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의 ‘신들’ 역시 ‘엘로힘’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계명을 다음과 같은 지금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앞에 두고서 너를 위한 또 다른 하나님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
광야의 백성들과 여로보암은 초조와 불안 속에서 자신들을 위한 하나님을 만들어냈다. 두렵게도 어쩌면 우리 역시 우리를 위한, 우리의 마음에 드는 하나님을 무의식중에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의학적 논쟁이 끝나지 않았다지만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뜻하는 다중인격(多重人格)은 한 인격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한 사람 안에 여러 인격이 들어있다는 현상이다. 어쩌면 나의 하나님도 그런 것이 아닐까? 나는 한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데 실상은 한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만든 여러 하나님이 함께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내 안에 하나처럼 보이는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 아니라 다중신격(多重神格)이라 부를 만한 하나님들일 수도 있다. 다중인격의 사례로 스무 명이 넘는 인격들이 한 사람 안에 들어있는 경우도 있었다는데, 충격적이게도 어쩌면 내 안의 하나님도 생각보다 많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지금도 내가 만든 여러 하나님들을 믿으면서 한 분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무서운 착각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도 이런 저런 이유로, 이런 저런 대의로, 이런 저런 불안으로 나를 위한 하나님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만든 하나님을 진짜 하나님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분 하나님이 아니라 여러 하나님을 믿고 있으면서, 그렇게 우리는 지금도 우상 숭배를 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이 말씀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한 분이셔야 한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내 안에서 벌어지는 우상 숭배를 피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이 신앙고백의 첫 문장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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