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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자리/신학마당

[신약 따라 걷기 - 배은망덕]

minkyo 2022. 2. 8. 10:10
주간 평화교회 92호| <신약따라걷기> 배은망덕

 

    예루살렘에는 가끔씩 천사들이 내려와 물을 휘저을 때 그리로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든 낫는다는 기적의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베데스다라고 불리는 이 연못가에 많은 병자들이 자리를 펴고 누워 때를 기다리고 있다. 그 중에는 무려 38년이나 병을 앓고 있으면서 그 자리에 누운 채로 기적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가장 빠른 자 단 한 명이 모든 것을 쟁취한다. 말하자면 이곳은 일등만 기억하는 세상이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 난데없이 등장하여 이 세상에 균열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보신다. ‘본다’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 주님의 눈에 든 것이다. 38년, 병자가 정확히 몇 살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38년이라면 아마도 그의 생애 대부분을 차지할 시간일 것이 분명하다. 바로 그런 그에게 시선을 주시며 예수님은 물으신다. “낫고 싶으냐?”(요 5:6)

    터무니없는 질문처럼 보인다. 짓궂은 조롱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그렇게 오랜 시절을 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에게 낫고 싶으냐니? 질문은 우리뿐 아니라 당사자 역시 당황스럽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병자는 물이 움직일 때 자기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는, 그리하여 이 경쟁에서는 도저히 일등이 될 희망이 없다는 초점을 벗어난 대답을 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를 도울 힘은 타인에게가 아니라 바로 네 안에 있다고 깨우치시며, 일등이 되기 위한 경주로부터 이탈할 때에야 비로소 승리가 주어진다고 깨우치시며,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요 5:8) 그러자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갔다고 성경은 전한다. 놀라운 치유의 기적 이야기이다. 예수님의 치유 능력뿐 아니라 주님의 명령을 의지하여 일어선 병자의 멋진 믿음도 함께 들어 있는 나무랄 데 없는 해피엔딩이다. 베데스다의 38년 된 병자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이야기는 아마도 대개 여기까지일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행복한 치유로 그치지 않고 반전을 기다리는 다음의 이야기로 계속되고 있으니 바로 배은망덕의 이야기이다.

    마침 이 날은 안식일이었다. 안식일에 행해진 예수님의 기적들에는 언제나 논쟁과 비판이 뒤따랐고, 이번의 치유 기적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병에서 나은 사람에게 안식일 규정을 들이대며 문제를 제기했다. 그가 자리, 즉 침상을 들고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 규정에 의하면 이것은 노동이었다. “나 주가 말한다. 너희가 생명을 잃지 않으려거든 안식일에는 어떠한 짐도 옮기지 말고 짐을 가지고 예루살렘의 성문 안으로 들어오지도 말아라. 안식일에는 너희의 집에서 짐도 내가지 말아라.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에게 명한 대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렘 17:21-22) 치유 받은 병자는 이 계명을 어긴 것이었다. 공격을 받은 38년 된 병자는 당황하여 황급히 대답한다. “나를 낫게 해주신 분이 나더라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하셨소.”(요 5:11) 자기를 낫게 해주신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인정이었을까? 아니다. 이것은 명백한 책임회피요 변명이었다. 그는 자기를 고쳐준 사람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오히려 얼마 후 예수께서 친히 그를 만나 자신의 정체를 밝히시고는 다음과 같은 이상한 말씀을 그에게 남기셨다. “네가 말끔히 나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생기지 않도록.”(요 5:14)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다시 죄를 지었고, 더 나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을 고쳐주신 예수님을 배신한 것이다.

    이름을 알자마자 그는 친히 유대인들에게 가서 고자질을 한다.(요 5:15) 안식일에 나를 낫게 한 사람은 바로 예수라고.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을 예수님을 박해하고(요 5:16), 그분을 죽이려고 했다(요 5:18). 이 모든 일이그의 고자질로 일어난 일이었다. 충격적인 일이다. 평생을 다해도 못 갚을 은혜에 대한 감사는커녕, 그는 배은망덕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어떤 사람은 38년 된 병자의 이 놀라운 배은망덕을 배은망덕에 관한 한 감히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이야기와 비교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우리에게 익숙한 이스라엘의 광야 방랑세월 40년을 신명기서는 정확하게 38년이라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신 2:14) 어찌되었든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병자는 전혀 감사할 줄 몰랐던 아홉 명의 나병환자(눅 17:11-19)와 함께, 그리고 배신의 아이콘 가룟 유다와 함께 배은망덕의 반열에 오른 신약성경의 대표인물이 되고 말았다.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 이야기(요 5:1-18)는 ‘기적’이라는 말 대신 독특하게도 ‘표징’(sign)이라는 신학적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요한복음에서 전체 일곱 개 표징 중 세 번째 표징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세 번째 표징 이야기는 바로 앞에 소개된 예수께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두 번째 표징과 대조된다. 그곳에서는 배은망덕의 결과가 아니라 왕의 신하와 그의 온 집안이 예수님을 믿게 된 믿음의 결과의 낳았기 때문이다.(요 4:54) 하지만 무엇보다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 이야기는 더 나중에 소개될 여섯 번째 표징 이야기, 즉 실로암 연못의 시각장애인 치유 이야기(요 9:1-41)와 가장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두 치유 이야기는 많은 공통점을 보여준다. 둘 다 치유 불가능한 질병을 전제로 하며, 중요한 장소로 연못이 등장한다. 두 병자 모두 처음에는 자신을 치료한 사람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리고 두 치유 모두 안식일에 이루어지며, 그에 따른 비난과 비판이 뒤따른다. 하지만 이후에 전개되는 이야기에서 두 사람의 태도는 확연히 달라진다. 배은망덕을 범한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와 달리 실로암 연못의 시각장애인은 출교의 위협(요 9:22)에 직면하면서도 당당히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맞선다. 그는 마침내 출교라는 대가를 치르면서까지도(요 9:34) 끝까지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정체를 모르는 상황에서도 실로암의 시각장애인은 예수님을 ‘예언자’로 고백하며(요 9:17), 출교를 당한 후 예수께서 스스로를 인자(人子)라고 소개하셨을 때에는 다음과 같은 위대한 고백을 예수께 드린다. “주님, 내가 믿습니다.”(요 9:38) 유감스럽게도 38년 된 병자는 왕의 신하와도 실로암의 시각장애인과도 완전히 다른 길을 걷고 말았다. 그는 배은망덕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하지만 더욱 본질적이며 치명적인 불행은 배은망덕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받은 최상의 은혜가 믿음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기에 이 이야기는 완벽하게 처절한 비극이다.

    우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때때로 누리는 은혜의 체험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기적과 축복의 체험은 우리의 신앙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더욱 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은혜의 체험이 신앙의 최종 목적지라는 착각에 빠진다면, 은혜로 주어진 기적과 축복이 믿음으로 향하는 발판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자리에 머물러 신앙을 썩게 만들어버리고 만다. 주님께서 경고하신 ‘더 나쁜 일’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표징이 표징에 그칠 때, 즉, 그 표지판(sign)이 가리키는 곳을 보지 못하고 표징만을 바라고 바라보며 산다면 이 38년 된 병자의 비극은 우리의 비극이 된다. 기적과 축복은 언제나 표징일 뿐이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가 더 중요한 것이다. 축복만을 바라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정작 궁극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한다. 축복은 신앙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축복의 다음 목적지는 믿음이며, 이 믿음은 실로암의 이야기처럼 주님을 위한 고난을 의미하는 것이다. 38년 된 병자의 예를 통하여 우리는 무서운 사실을 확인한다. 은혜와 축복이 믿음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 주님은 분명하게 경고하셨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그리하여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생기지 않도록 하여라.” ‘더 나쁜 일’은 육적인 차원이 아닌 영적인 차원의 문제다. 결국 이 병자는 더 나쁜 일에 걸리고 말았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신체의 장애가 제거되었는데, 영혼은 더 잘못되고 말았다는 아이러니라니!신앙에 있어서 배은망덕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와 축복으로 믿음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배은망덕이다. 배은망덕(背恩忘德). 은혜를 배신하고 받은 덕을 잊는 행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값비싼 은혜로 지켜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받은 은혜가 배은망덕으로 흐르지 않고 믿음으로 흐르도록, 고난으로 흐르도록 애써야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