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말씀 : 주님은, 들짐승들이 뜯을 풀이 자라게 하시고, 사람들이 밭갈이로 채소를 얻게 하시고, 땅에서 먹거리를 얻게 하셨습니다. (시 104:14, 새번역)
지난 ‘환경선교주일’에 교우들과 방울토마토 씨앗을 심었다. 기후 위기를 주제 삼은 ‘생태적’ 설교를 나눈 후 결단 예식을 특별히 마련하여,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와 씨앗 한 두 개씩을 집어 화분에 심게 한 것이다. 심는다, 는 표현은 사실 너무 거창한 말이고 내가 미리 손가락으로 살짝 눌러둔 몇 개의 작은 구덩이에 씨앗을 슬쩍 내려놓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래도 예식을 진행하며 마음이 흡족했다. 교우들의 몸에 무언가 각인이 되는 시간이었을 것 같아서 말이다.
문제는 다음 날부터였는데, 매일 물을 주며 돌봐줘야 해서 평소 같지 않게 매일 교회에 나갔다. 목사가 교회에 나가는 건 물론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평소에 ‘감리교생태목회연구소’ 일도 겸하고 있어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교회는 김포, 연구소는 서울, 집은 인천이다. 고작(?) 방울토마토 때문에 평소에도 최소 3시간씩 하던 운전 시간이 1시간 가량 더 늘어나서 몸이 정말 힘들었다.
한 삼일쯤 지났을까. 내 마음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런다고 싹이 날까?’ 싶었던 것이다. 설명서에 쓰여 있는 대로 심고 나름 성실하게 돌봐줬지만, 그런 일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전형적인 ‘도시 남자’였던 나는 결국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싹이 나지 않으면 교우들 보기 무안해서 어쩌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금요일이 되었다. 아이를 돌보다 저녁 늦게 차를 몰아 교회에 도착했다. 그냥 물이나 줘야지, 싹은 무슨 싹인가, 하는 축 처진 마음으로 화분이 놓인 창가를 향했다. 그러다 정말로 큰 충격을 받았다. 새끼손톱보다 더 작은 싹들이 여서, 일곱 개나 올라와 있는 것이었다. 얼마나 놀랍던지, 그 생명의 신비에 어안이 벙벙했다. 어떻게 없던 것이 있게 되었나, 어째서 없지 않고 있게 되었나, 하는 그 느낌을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웠다. ‘존재’는 신비한 일이다, 라고 철학적으로 말하면 매일 농사를 짓는 분들이 나를 한심하게 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진심으로 내 마음을 표현하는 중이다. 그래서 다시 꾹 눌러 써본다. 존재는 신비한 일이라고. 그러고 보니 세상은 신비한 것이 지천에 널렸다.
단점만 말하고 싶지 않지만, 소위 자본주의 체제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신비한 세상을 시시하게 보이게 한다. 누군가 이 체제를 옹호하며 수많은 장점을 나열하고, 나 역시 거기에 동의할지도 모르지만 이 단점은 정말로 치명적이다. 생각해 보라. 방울토마토가 없지 않고 있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가. 내가 없지 않고, 그대가 없지 않고, 돌고래와 사슴이 없지 않고 있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가. 이 놀라움의 감각을 마비시켜 영혼의 생기를 앗아가는 세상은 그래서 타락한 세상이다. 많은 이들이 그토록 바라는 행복에 도달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이웃이 경쟁자로, 자연이 수탈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인간 스스로 궁지에 내몰린다. 이것이 우리의 아픈 현실 아닐까.
5개월 전 목회를 시작하며, 주보에 매번 ‘이번 주 기도 제목’을 하나의 문장 형태로 적어왔다. 환경선교주일 주보에는 이렇게 적었다. “주님, 저는 이만하면 괜찮습니다” 라고. 그리고 교우들에게 이런 설명을 드렸다. 만약 신의 지위에 올라선 돈에게 인격이 있다면, 이만하면 괜찮다는 사람들을 가장 미워하지 않겠느냐고, 그 미움을 받고 사는 것이 신앙생활 아니겠느냐고.
하나님께서 빚어 가시는 생명의 신비에 영안이 활짝 열린 나머지, 나는 이만하면 정말 괜찮다고, 충분히 재밌게 살고 있어서 그것을 꼭 먹지 않아도, 사지 않아도, 가보지 않아도 정말로 괜찮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처럼 자유로운 인생이 어디 있을까. 그것처럼 혁명적인 삶이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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