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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엘로힘, 장애인은 있었다
류흥주 목사 / 뇌병변1급, 너와나의교회 담임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창세기 1장 11~13)
‘장애인선교주일’이 하필 ‘부활주일’과 겹칠까? 장애인 당사자로 불만이 많다.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장애인에게 부활소식 전하고 챙겨주란 계시가 아닐까? ‘꿈보다 해몽이다?’ 본문 창세기 1장 11~13절의 창조(바라 엘로힘)를 통해 성도의 장애 관에 대해 생각하려 한다. 궁창 아래 창조(지구창조/궁창 위의 창조; 우주 창조)에서 특징은 하나님의 속성이 만족(13.31절)할 만큼 완전한 창조였다.
첫째는, 모든 창조물은 고유한 ‘다름’, ‘다양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장애는 그 다양함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장애의 정의, ‘다른 능력’의 ‘disable’은 성서적이다. 다양하고 완벽한 존재들이 이미 시작 단계에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견본(絹本)으로서 성인 백인 남녀 한 쌍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다분히 인종 우월주의를 표현하는 근본주의가 아니라, 처음부터 다양한 존재. 인종별, 성별, 연령별, 다양한 모양들, 뚱뚱한, 마른, 젊은, 나이든, 어린, 장성한, 심지어는 출4:11의 ‘장애인’까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선포하셨다. 어떻게?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러니까 하나님의 창조, 창세기 기자는 ‘바라 엘로힘’이라고 겸손히 고백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창조는 신의 속성이 만족 할 만큼 결과(1:13, 31)를 내었다는 것이다. 비록 인간, ‘신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어진, 위대한 창조물이긴 하나 한계(뇌 용량)를 가진 존재 이기에 이해할 수 없다. 다양함은 우열이 없는 모두 귀중한(1:26~27), 순결한(행10:15) 존재함으로서 창조를 완성하고 아름다움을, 창조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두울, 창조의 다양함은 하나님의 고유한 존재방식이기에 차별이나 배제, 강요할 수 없다. 출애굽기 4장 11절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장애인도, 그의 시대에는 저주와 죄의 상징이었던 존재를 태초의 창조시기에 하나님의 성품을 기본 옵션으로 한 존재로, 당신의 만족함을 느낄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된 소중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장애를 싫어할까? 왜 절망할까? 왜 장애를 축복이라 선포하지 못할까? 왜 장애인 이 되었다고 자살을 할까? 왜 주변 사람들은 위로하고, 극복하라고 다그칠까? 하자? 있는 걸까? 그것은 비교 하거나 당하기(강요당하기) 때문이다 자신과 다른 것을 열등한 것으로 규정하고 같아질 것을 강요한다. 이를 달성한 이를 칭찬하고 성공한 자로 칭찬한다. 실패하거나 거부한 이를 혐오하고 배척한다. 비교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죄이다. 인류 최초의 죄는 비교이다 비교는 살인을 낳았다. 카인은 자신의 제사가 열납 되지 않은 것을 자신과 하나님 관계에서 찾지 않고 전혀 다른 삶을 사는(목축업) 동생 아벨에게서 찾았다. 결국 동생을 혐오하고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사도바울이 고전 12:21~24에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경고했으나, “넌 왜 그렇게 생겼니?”, “우리 아이들이 보고 놀라겠다”. “바보, 병신 흉내 내겠다”. “눈에 보이지 마!!”, “왜 못하니?”, “믿음이 없구나?” 이런 인식을 강요하고, 사회 구조적으로 힘들게(편의시설 미설치. 레19:14) 한다. 그래서 장애인들은, 중도 장애인이 되는 것(등록장애인의 90%)을 저주로 받아 들인다. 그래서 자살율이 높은지 모르겠다.
세엣. 내가 먼저 인식이 송두리째 바뀌어야 한다. 예수님은 생각이 다르셨다. 마11:5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답변 하셨다. 바울 사도는 고전1:27에서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오직 예수를 주되게 하며,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게 하는 진실한 도구로 쓰실 축복이라 하셨다. 우리 신앙인들은 주를 위해 목숨도 기꺼이 바치며, 믿음과 사랑을 지키기 위해 손도 찍어 버리겠노라고 고백한다. 이것이 장애를 입음과 무엇이 다른가?
넷, 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 자신은 변하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꾸셨다. 롬5:8, 나도 모르게 먼저 실천하셨다. 신을 포기하고 인간이 되셨으며, 신의 영생을 포기하고 인간으로 죽으셨다. 그리고 너와 나도 그러시길 바라셨다(빌 2:5~7) 전통적인 신인(神人) 관계의 인식을 찢으셨다. 나를 버리고 너를 인정하자 이게 사랑이며 믿음이다. 그래야 세상이, 그가 변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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