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세대에게 부채감이 있는가?
아니 동질감이다.
민주화 세대를 강하게 역사적 참여를 추동했던 것은 다름 아닌 ‘부채감’이 대표적일 것이다. 70년은 전태일의 죽음, 80년 광주민주항쟁은 민주화 세대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역사적 부름이었을 테다. 청년 전태일은 주변에 대학생 친구가 없는 것을 두고 끝내 아쉬워했고, 이 아쉬움은 그 당시 대학생들에게 양심의 채찍이 되어 돌아왔다. 광주민주항쟁은 군부독재시절 나라가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아닌 국민을 학살하는 후안무치한 나라 같지도 않은 나라, 전혀 국민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권력을 연장하기 위한 도구로써의 나라였다. 광주시민들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희생당했다.
전태일의 분신, 광주시민들의 희생은 부채감이다. 이 부채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역사적 부름이었다. 이에 응답한 이들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골격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부인할 수 없다. 87년 이전을 우리는 야만의 시대라고, 독재의 시대라고 부른다. 부끄러운 역사와 반성과 반성을 뼈져리게 해야 할 시기였다. 그러니 이 시기에 호의호식한 이들은 분명 평생, 대한민국에 머무는 한 사죄는 필수요건일테다. 칭찬 ‘개’나 줘버려야 한다. 이 당시의 희생은 한마디로 참옥하기 그지없는 희생이다. 명복을 빈다.
50년 전, 전태일의 분신은 두고만 볼 수 없었고, 산업고도화와 개발고도화를 쉼 없이 부르짖었던 모두들에게 사람이 기계가 아니라는 사실에 경종을 울렸다. 산업화를 관통하는 그 시대에 ‘인권’, ‘노동권’의 필요성을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으로 깨닫게 되는 희생이었다. 50년이 지난 지금, 형태와 내용만 달라졌을 뿐, 청년 전태일의 부르짖음은 안타깝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게 50년 후 청년 노동자 김용균이 운명을 달리했다. 김용균의 죽음은 우리의 노동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법과 제도는 요리조리 피할 수 있게 구멍이 송송 뚫린 지 오래다. 이제부터 시행될 중대재해법 또한 무언가 석연치 않다. 여야가 피해당사자나 현재의 노동자들의 현실을 무시한 채 자신들의 정치적 인과관계만을 따진 채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김용균의 죽음은 현재 20대 청년 노동자들에게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플랫폼 노동자로, 특수고용직으로, 계약직으로, 인턴으로 그리고 비정규직으로 또 다른 김용균이 열악한 노동환경과 엄청난 노동강도을 감내하고 버티고 있다. 이는 방직공장에서 폐렴을 참아가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그 당시와 다를 바가 없다. 그렇게 MZ세대는 김용균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내가 김용균이다. 나는 기계가 아니다.”
광주민주항쟁은 이데올로기에 희생당함은 물론 나라에 의해서 철저하게 짓밟힌 민중들이었다. 이 민중들은 희생당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희생당했다. 그렇게 부채감으로 자리잡고 민주화운동은 시대적 사명감이었다. 40년 뒤 광장에 촛불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서만 촛불이 물결이 된 것이 아니라, 전국에서 촛불은 강하게 불타올랐다. 또 다른 민주화의 염원은 적폐청산과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정권을 세웠다. 그리고 2030들에게는 이번 정권은 그야말로, 배반이었다. 2030에게는 촛불이 그동안의 부조리와 부패에 대한 대답이었다. 팽목에서의 4월 16일은 우리들에게 부채감으로 다가왔지만, 그동안 민주화세대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과 정책들이 잘 못되었다는 것을 처절하게 보여준 모멘텀이었다. 단원고 학생들에게 우리는 동질감을 느꼈다. 그 배 안에서 그 누구라도 방송의 지시를 따랐고, 초기조치를 기다렸을 것이다.
“가만히 있으라.”
민주화 세대가 추동했던 역사적 부름이 더 이상 MZ세대에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MZ에게는 역사적 책임감으로 남게 된다. 역사적 책임감이란, 청년 전태일과 광주민주항쟁의 정신을 계승하고 그 얼을 이어받는 책임감이다.
"shot out respect"
김용균과 세월호는 동질감과 공감을 일으킨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동질감은 지금의 현실이 녹록치 않다는 것이며, 그만큼 만연되어 있다는 것이다. 부채감은 일종의 죄책감과 반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당사자성이 아니다. 하지만 동질감은 당사자성이다. 당사자와 당사자는 교차성을 묶일 수 있다. 그만큼 다양한 현실 상황속에서 동질감은 세분화 되어 있다. 그래서 동질감을 느끼는 것, 공감을 일으키는 것은 두 단계를 거쳐야지만 가능하다. 그러니 복잡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질감을 놓치는 순간, 한 발작도 나아가지 못한다. 동질감으로 상호연대하는 것, 이것이 2022년을 준비하는 우리들에게 놓인 숙제이다. 부채감으로 무엇을 하는 시대는 끝이 난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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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남기평 목사 (평화교회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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