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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평화/정의 평화

무중력세대 ㅣ 청년들은 어디에 있을까?

minkyo 2022. 2. 14. 11:41
[웹진 평:상 57호] 무중력세대 | 청년들은 어디에 있을까? - 필수노동과 청년

 

청년들은 사라졌을까? 아니면 보지 않는 것일까? 이것도 아니면, 우리가 보지 못하는 걸까? 적어도 인구비율에 25~30%는 청년임에는 틀림없다. 없을 리 만무하다. 보지 못하는 것이다. 도시생활권에 살면서, 청년을 보지 못한다는 것, 청년들은 ‘투명인간’인 셈이다. 영화처럼 어떤 약을 먹거나, 실험에 의해서 투명인간이 된 것이 아니다. 청년들에게 극적인 어떠한 사건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냥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청년’들의 존재가 귀한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청년들은 어디있을까? 이태원? 홍대? 을지로? 강남? 코로나19 위기를 맞아서, 비난의 화살은 여기에 몰려드는 청년들에게 향한다. 클럽발, 할로윈발 등으로 청년들이 아무 생각 없이, 아무런 대책 없이 하루를 즐기기 위해서 몰려들고, 이것 때문에 코로나가 진정되지 않는다고 한다. 방역지침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비판받아야 한다. 한 가지 짚어 봐야 할 것은, 청년들만의 문화가 있는지 우리는 먼저 물어야 한다. 청년들의 놀이문화는 40-60대의 놀이문화와 다르지 않다. 만나서, 이야기하며 먹고 마시고 노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없다. 이를 비판한다면, 한국의 놀이문화, 밤문화 자체를 비판해야 할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서 선택지도 많지 않다. 거리 쏟아져 나와도 막을 방도가 없다. 

 

밤에만 청년들을 본다는 것, 이는 오산이다. 청년들은 낮, 즉 일과시간에도 활동한다. 특별히 필수노동의 영역에서 활동하게 된다. 코로나19 이후로 필수노동의 영역이 드러났다. 그 전에는 이들의 노동이 취급받지 못했다. ‘투명인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직접 마주치지 않는다.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 중 돌봄노동, 택배원, 점원, 그리고 배달원까지 대부분 청년들이 이 일을 감당한다. 코로나19 노동강도는 더 세졌고, 업무량은 배로 늘었다. 여기저기서 아우성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간과했던 사실, 세상이 편리해지고, 빨라졌다고 모두가 입을 모아 이 시대의 문명을 칭찬했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이 사람이 하는 일이었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이들을 보지 못하고, 청년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주위를 둘러보시라, 청년들은 이 필수노동을 감당하고 있는 중이다. 

 

청년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도처에 있다. 우리가 이들을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흡사 기계 혹은 투명인간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각 매장에 키오스크나 여러 자동 판매대로 기계화 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이 일을 해야 결국엔 얻을 수 있다. 우리들 생활권에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과연 이들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까? 필수노동이 사라진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까? 김용균이 화력발전소에서 억울하게 운명을 달리했다. 지금도 기계를 다루고, 전기를 얻기 위해 콘센트를 찾고 있다면, 그 전기는 필수노동으로부터 왔다. 누군가에 희생에서 왔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놈의 세상은 GDP가 3만불이 넘었지만, 노동환경은 더 열악해졌고, 노동의 질은 형편없다. 그리고 코로나19로 지금까지 우리가 가보지 못한 New-Normal로 가고 있다. 이러면서 노동강도는 올라가고, 업무량은 늘어난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버튼하나로 모든 것이 된다고 하는데, 노동, 특히 필수노동은 버튼하나로 할 수 없는가? 필수노동자들은 투명인간이 아니다. 청년들도 투명인간이 아니다. 

 

이 시대, 오늘날 교회에 사회 구성원이고, 현재이다. 

필수노동이 등한시 되고 무시되는 사회는 최악이다. 

 

 

 

글쓴이 : 남기평(평화교회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