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영도에 위치한 흰여울교회입니다.

신앙의 자리/신학마당

두루 찾아가셔서

minkyo 2022. 2. 14. 11:45
[웹진 평:상 58호] 평.보.성 | 두루 찾아가셔서(마가복음 1:32~39)

 

 

 

성서본문 : 마가복음 1:32-39

32 해가 져서 날이 저물 때에, 사람들이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33 그리고 온 동네 사람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34 그는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35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36 그 때에 시몬과 그의 일행이 예수를 찾아 나섰다. 37 그들은 예수를 만나자 “모두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39 예수께서 온 갈릴리와 여러 회당을 두루 찾아가셔서 말씀을 전하고, 귀신들을 쫓아내셨다.

 

수께서 귀신을 내쫓으실 때 꼭 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그는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34절). 귀신들이 어떤 말도 하지 못하게 입을 막는다는 것입니다. 귀신들이 예수의 정체를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귀신들이 예수의 정체를 말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예수의 권위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은폐하려는 데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를 따르는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사실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권위를 세우기를 누구보다 좋아하는 우리들에게, 예수의 이 모습은 아주 뼈아픈 가르침을 줍니다. 특히 지금의 교회에게 이러한 예수의 모습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의 괴리가 느껴질 정도로 이질적으로 다가옵니다. 믿음마저도 피 튀기는 경쟁이 되었고, 헌신마저도 치열한 각축의 장이 되어버린 교회. 남보다 더 열광적인 믿음과 탁월한 헌신을 하는 것에 어느덧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우리 자신. 언제부터 교회가 서로를 검증해야 하는 종교가 되었을까요. 오직 하나님께만 인정받으면 된 것이고, 우리 서로는 누가 더 우위에 있나 검증해야 할 관계가 아니라 사랑하고 축복해야 할 관계여야 하는데 말입니다.

 

아주 이른 새벽에 외딴 곳에 가셔서 기도하신 예수의 모습 속에서도 전혀 매이지 않는 모습을 우리는 또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시몬과 그의 일행이 예수를 찾아 나섰습니다. 마침내 예수를 발견한 그들은 예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모두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37절). 전날까지 온 동네 사람의 질병과 귀신들림을 고치신 예수는 일약 대스타가 되었습니다. 누구보다 이 인기를 피부로 느낀 이들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어부란 이유로 많은 이들에게 외면 받았던 인생에서, 스승을 잘 만난 이유로 모든 사람들의 인기를 간접적으로 받게 된 인생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예수의 인기에 누구보다 흥분했던 것도 제자들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흥분이 아주 이른 새벽부터 예수를 찾아 나서게 해준 이유였을 것입니다. 마치 새벽같이 방송 스케줄을 소화해야 하는 인기 연예인의 매니저가 된 심정 같았다고 할까요? ‘모두 선생님을 찾고 있다’는 그들의 말투에서 피어오르는 흥분과 기대감을 쉽게 감출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흥분에 찬 물을 끼얹는 듯한 말씀을 하기 시작합니다.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38절). 제자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예수님은 지금 자신을 찾고 있는 무리들로부터 돌아섭니다. 마치 자신을 향한 군중들의 인기를 의도적으로 피하시듯이, 다른 고을로 가서 말씀을 선포하기로 작정하십니다.

 

 

 

 

 

 

 

 

 

마가는 마지막으로 예수의 사역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와 여러 회당을 두루 찾아가셔서 말씀을 전하고, 귀신들을 쫓아내셨다.(39절). 예수는 온 갈릴리와 여러 회당을 두루 찾아가십니다. 분명 여기에는 자신을 찾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로 가지 않고, 예수 자신이 찾아가야 할 사람들에게 찾아가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사람의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순전히 자신의 필요에 따라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가시지 않고, 자신이 찾는 사람들에게 가셨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의 대단함과 탁월함을 옆에서 큰 소리로 선전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얼마나 고마운 사람입니까? 그게 귀신이었어도 우리에겐 귀신이 아닌 귀인일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내가 필요해서, 나를 보고 싶어서, 나를 좋아해서 나를 찾아준다면, 우리가 그 인기를 마다할 이유가 조금이라도 있겠습니까? 이게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이루고 싶은 관계의 꿈 아닙니까? 내 탁월함을 동료들이 인정해주고 이야기해주고 선전해주는 모습. 이 공동체에 내가 없으면 안 될 것처럼 나를 필요로 하고 나를 찾아주는 모습. 많은 이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어디에서나 부르고 싶고 찾고 싶은 그런 사람. 얼마나 고급스러워 보입니까?

 

예수께서 주현하셔서 사셨던 삶은 그와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는 단지 과도한 인기를 부담스러워 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제아무리 부담스러워도 자연스러운 인기현상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제시킬 수는 있어도 적당히 누릴 거 누리면서 소극적으로나마 자신의 인기를 즐겼을 수도 있죠. 그러나 예수의 모습은 마치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쏠리는 관심과 인기를 피하시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아예 귀신의 입을 다물게 하질 않나, 자신을 찾는 사람들을 바람맞히질 않나,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셨을까요? 만약 실제로 우리 중에 예수처럼 이렇게까지 의도적으로 인기와 거리를 두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보고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마 꼴값한다고 생각하겠죠.

 

도대체 예수를 이렇게까지 움직였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39절). 예수님을 움직였던 것은 꼴값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명확한 소명의식이었습니다. 예수에게 중요했던 것은 자신이 해야 할 ‘이 일’ 이었습니다. ‘이 일’이란 예수께서 주현하신 그 목적 자체이며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부여하신 사명 그 자체일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일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방해가 될 수 있는 요소는 바로 예수 자신의 인기라는 사실을 예수 본인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심령 가운데 세우는 일과, 예수의 팬클럽을 세우는 일은 엄연히 다른 일이니까요.

 

예수를 따르는 삶이란 나의 안위와 인기보다 타인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며 예수의 사랑 안에 서로 매어있음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자신을 찾는 사람들에게로 돌아서셨던 예수의 선택은 결국 그 분의 사랑이 어느 누구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열려있음을 드러낸 위대한 행적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역시 우리가 두루 찾아가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사랑에 배제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글쓴이 : 박형순(평화교회연구소 연구원 / 희망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