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입술은 주님 닮은 듯하나 내 맘은 아직도 추하여…”라는 복음성가 가사가 있습니다.
쓰는 용어에서는 예수 믿는 티가 나는데 실제 살아가는 모습에서는 예수를 믿는 표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실제로 있습니다.
물론 신앙이 자라나는 첫 단계로 사용하는 말투를 종교적으로 교정하는 것은 괜찮습니다만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바뀌지 않고 말투만 바뀌는 것으로 신앙을 따지는 것은 심히 유감입니다.
교회에서 들은풍월이 있는 사람들은 완곡한 거절을 나타낼 때 “곤란하다”고 하지 않고 “기도해 보고 결정하겠다”고 합니다.
어떤 일이 하기 싫을 때에는 “마음에 감동이 없다”고 하고, 남편이나 자식이 속을 상하게 하면 “십자가”라고 합니다.
“난 전도하기 싫어”라고 말하면 신앙 없는 사람이 되지만 “나는 전도에 달란트가 없어”라고 하면 그럴 듯하게 넘어갑니다.
사용하는 용어가 종교적으로 바뀌는 단적인 예들입니다.
“시험”이라는 단어가 특히 그렇습니다.
교인들은 주로 속상한 자기감정을 표현할 때 “시험 들었다”고 하는데 그런 시험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 시험이 나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을 연단하시는 시험입니다.
영어로는 “test”에 해당하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한 것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유혹하는 시험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temptation”인데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받았던 유혹이 대표적입니다.
결국 우리가 받는 시험은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연단과 마귀가 우리를 시험하는 유혹,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전혀 엉뚱한 경우에 “시험”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붙입니다.
예를 들면 목사님이 설교 중에 헌금 얘기를 하면 시험에 든다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시험은 어떤 시험이겠습니까?
도무지 성경에 없는 시험입니다.
특히 헌금 얘기를 하면 시험 든다는 사람 치고 헌금에 후한 사람은 없습니다.
주로 헌금에 인색한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결국 교묘한 말장난일 뿐입니다.
자기가 헌금에 인색한 것을 스스로 압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공개되는 것은 싫습니다.
그런데 설교 중에 그 얘기를 하니까 속이 뜨끔합니다.
하지만 속만 뜨끔하고 자기를 고칠 마음은 없습니다.
제발 헌금 얘기를 안 했으면 좋겠는데 자꾸 그 얘기를 하니까 마음이 불편합니다.
이런 마음의 상태를 가리켜서 “시험”이라는 단어로 포장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험이 아니라 단지 “헌금 얘기는 안 했으면 좋겠다” 하는 자기의 속마음을 그럴듯하게 바꿔서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 속상하다고 말하는 내용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시험 들었다고 바꿔서 표현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자기를 고쳐야 할 책임이 당연히 자기에게 있는데 “헌금 얘기하면 시험 든다”고 하여, 마치 자기에게 시험이 들게 한 사람에게 잘못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참으로 유감입니다.
사용하는 단어에서 그 사람의 신앙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단어를 사용해서 나타내야 하는 그 사람의 속마음에 신앙이 좌우됩니다.
초신자 때는 “속상하다”고 말하다가 어느 정도 연륜이 쌓이면 “시험 들었다”고 말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초신자 때는 속상하던 내용이 연륜이 쌓이면서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되고 반대로 초신자 때는 아무렇지도 않던 내용이 연륜이 쌓이면서 걱정거리가 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늘에 닿는기도- 강학종 목사> p139~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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