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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평화/생명 평화

다시 예수 그리스도로

minkyo 2022. 2. 7. 09:10
[웹진 평:상 67호] 평.보.성 | 다시 예수 그리스도로

14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15 (요한은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쳤다. “이분이 내가 말씀드린 바로 그분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이분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그분은 사실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16 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함에서 선물을 받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받았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18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외아들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려주셨다.

(요한복음 1:14~18)

 

     임인년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는 크게 나아진 것 없이 여전히 코로나로 인해 위축된 생활을 보냈습니다. 근데 이제는 그러한 생활도 한계인가봅니다. 작년 새해 첫날 어떤 바다에서의 해돋이 사진과 동일한 장소에서의 올해 새해 첫날 해돋이 사진을 비교한 걸 우연히 봤는데, 작년에는 텅 비어있었던 그곳이 올해는 사람이 미어터질 정도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일상에 제한이 있는 삶에 점점 한계를 느끼고 있다는 증거겠지요. 이제는 코로나에 대해서도 점차 무던해지면서 일상에서의 잃었던 삶의 순간을 다시 되찾으려고 하는 욕구들이 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아마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여러 가지 제한되었던 교회 생활들도 하나 둘씩 제자리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다시 교회의 자리로, 예배의 자리로, 사역의 자리로, 헌신의 자리로, 모임의 자리로, 성경공부와 중보기도의 자리로 돌아가는 일들이 많아질 겁니다.

 

     모두가 원래의 삶을 회복하고 싶어하고, 반드시 원래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겠다는 다짐까지 보이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진중하게 물어야 할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이토록 돌아가야 할 많은 자리 중에, 과연 우리가 진정으로 돌아가야 할 자리는 어디일까요?

 

     현재 우리는 모두 회복을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꿔 말한다면 지금 우리 모두는 무언가에 ‘결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기대하고만 싶은 이 상황은 어쩌면 위험한 상황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을 다 되돌리고 싶은 흐름 속에서, 우리는 지금껏 느껴왔던 결핍으로 인해 우리의 판단력이 흐려질 위험 말입니다. 강한 결핍을 느끼는 만큼 무분별하게 강한 욕망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러한 기대와는 다르게 정작 우리의 개인의 삶,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삶은 더디고 큰 티가 나지 않게 회복이 될지도 모릅니다. 설령 다시 회복한다고 해도 이전과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보일지도 모릅니다. 이미 많은 전문가들이 말하죠. 우리의 회복은 결코 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구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회복한다 해도 코로나 이전의 교회의 모습을 가지고 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부분에서 당혹스러워할 겁니다. 특히나 교회 생활 자체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이라면 말이죠. 그간의 많은 교회들이 추구해왔던 신앙, 신자에게 진리이다시피 강조했던 신앙은 지극히 형식적이고 율법적이며 교조적인 신앙이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결핍을 느껴왔으며, 이런 교회의 모습이 그대로 회복되어야 진정한 회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매우 공격적으로 그 삶을 동경하고, 어떻게든 이루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다시 돌아가야 할 지점을 제대로 설정해야 합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죠.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야 합니까?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 본문 말씀을 빌어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함에서 선물을 받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았다.”(16절). 결국 우리의 결핍을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 밖에 없다고 말이죠.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받았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났다.”(17절). 결핍의 중심에 있는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자신이 지금 무엇에 결핍되었는지에 몰두하여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 채우려고 하는 선택, 소위 율법적 선택입니다. 결핍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고, 그 결핍을 어떻게든 채우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공격적일지언정 채우려고 하죠. 실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강요했던 ‘할례’와 ‘율법의 행실’이 이에 속하지요. 지난 코로나 상황 속에서 수많은 교회와 목회자들,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모임 제한을 ‘탄압’이라 규정함으로 민폐를 끼치면서까지 형식적 모임을 고수했던 모습도 겹쳐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결핍을 회복할 선택지는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이 결핍이 어떤 외부적인 상황에서 오는 것이 아닌 자신의 내면의 문제라고 여기는, 소위 은혜적인 선택입니다. 외부적인 환경이나 상황의 변화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이었든 자신과 늘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하니까요. 우리가 진정으로 결핍된 것, 모자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을 충분히 예배할 시간? 기도 시간? 어쩌면 우리에게는 그동안 우리의 삶에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한결같이 함께 해왔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깨닫는 깊이가 모자란 것 아니었을까요? 제가 믿는 것은, 우리는 코로나 이전까지 해왔던 신앙생활을 통해서도 많은 은혜를 경험했지만, 지난 2년간의 코로나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은혜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니까요.

 

     감히 제안합니다. 올해는 우리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어떻게든 교회를 더 많이 출석해야하지 않겠냐는 호들갑은 잠시 접어두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지난 2년간의 결핍의 순간에도 당신과 늘 언제나 동일하게 함께 하셨습니다. 그 진리 안에서 당신의 마음이 충만함을 느끼기를 제안합니다. 다만 우리가 돌아가야 할 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입니다. 그 분이 영광과 평화로 오신 자리, 그 분이 사랑과 환대를 베푸셨던 자리, 그 분이 누군가를 위해 고난과 희생을 감수하셨던 자리, 그 모든 것들을 경험할 수 있는 그 분의 삶의 자리, 그 자리가 곧 우리가 거해야 할 자리입니다. 검은 호랑이 기운으로 그 자리에서 만납시다.

 

글쓴이 : 박형순 목사(희망교회/평화교회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