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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평화/정의 평화

정답없는 사회

minkyo 2022. 4. 5. 20:34
[웹진 평:상 69호] 무중력세대 | 정답 없는 사회

청년고독사라는 말이 미디어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고독사란 말 그대로 주변 사람들과 단절된 채 홀로 살다가 아무도 모르게 생을 마감하는 고독한 죽음을 말합니다. 주로 독거노인이나, 중년의 남성들의 일로만 여겨졌지만, 최근 들어 20, 30대 고독사가 늘어나고 있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중입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지난 3년간 청년고독사의 사례가 62%나 늘어났다고 하니, 심각하게 이 문제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독사의 원인으로는 가장 먼저 1인가구의 증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20, 30대가 40%를 차지하는 1인 가구가 점차 증가하면서 자연스레 청년고독사도 증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1인 가구의 증가가 고독사의 근본적인 원인은 아닙니다. 청년 1인가구가 경제적 빈곤을 경험하고, 취약한 주거환경에 내몰리는 것, 그리하여 심리적 물질적으로 고립되는 것인 실질적인 청년고독사의 원인입니다.

 

청년고독사의 증가는 우리사회 청년들이 얼마나 불안한 삶을 살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불안은 개인의 것임과 동시에 사회의 것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한 극심한 경기침체, 얼어붙은 취업시장, 부동산폭등으로 인한 주거문제 등과 같은 불안정한 사회경제적 여건은 청년들을 경제적 고립으로 몰아세웠습니다. 경제적 고립은 관계의 단절로 이어지고, 관계의 단절은 우울증으로, 극단적인 경우는 고독사로 이어집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시기니 참고 견뎌라”, “청년시절의 고생은 사서도 한다”, “청년시절에 힘들지 않은 사람이 있나?” 같은 청년들의 나약함을 탓하는 기성세대의 이야기는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괜히 꼰대라는 말이 유행했을까요? 그러한 말들은 청년시절의 노력과 학력이 웬만하면 실제 삶의 개선으로 이어지고, 소위 계층이동이 이어질 수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기성세대는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지금 청년세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는 개인의 학업성취와 노력만으로는 출발선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삼포세대, 칠포세대, 달관세대, 수저론, 이생망 등의 용어들은 더 이상의 길 찾기를 포기하는 청년세대의 절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청년들이 느끼는 불안에 관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접근해보겠습니다. 정신의학적 용어로 불안이란 불쾌한 일이 예상되거나 위험이 닥칠 것처럼 느껴지는 불쾌한 상태를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은 공포와 함께 두려움의 감정에서 나오는 한 갈래로, 대상의 실재 여부에 따라 나눠집니다. 그러니까 두려움의 대상이 명확하다면 그것은 공포이고, 대상이 명확하지 않고 미래의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면, 그 때 느끼는 감정은 불안입니다. 청년들이 불안을 느끼는 것은 후자와 같은 불확실성, 모호성 때문입니다.

 

그러면 청년 구체적으로 어떤 불확실성과 모호성에서 불안을 느끼는 것일까요? 첫 번째는 미래에 대한 모호성입니다. 지금 청년들에게 미래는 불투명합니다. 어느 정도 노력하면 결실이 보여야하는데, 보이지 않습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저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서인데, 그마저도 기약이 없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청년들은 다음 단계의 삶, 다른 차원의 삶을 모색하는 것에 대해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도전이 청년의 미덕이라는 말은 이제 옛말입니다. 도전은 도박입니다. 실패하면 다음은 없습니다. 그러니 다양한 진로와 창조적 삶의 가능성보다는 그나마 안전하고 단선화 된 진로를 선택하고 준비합니다. 물론 이것도 기약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말입니다.

 

청년들이 느끼는 불안은 미래에 대한 모호성에서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모호성에서도 불안은 찾아옵니다. 청년들은 사회가 규정한 정상적인 삶과 자신의 고유한 삶의 사이에서 괴리감과 불안을 느낍니다. 사회는 끊임없이 정상적인 삶의 모델을 제시해주고, 그러한 삶이 행복한 삶, 평범하고, 바람직한 삶이라고 말합니다. 직업은 무엇이 좋은지, 연봉은 적어도 얼마 이상이어야 하는지, 집은 몇 평은 되어야 하는지, 노후를 대비하기 연금을 얼마나 부어야하는지 등등 평범한 삶의 조건들은 매우 세밀합니다. 특별히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을 소비하는 주체로 만들어냅니다. 소비할 수 있는 삶이 정상적인 삶입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효율적인 일들을 선택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삶이 주체화되는 것은 그 자체로는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의 삶에는 형식이 덧씌워집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획일화되고 단선화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사회가 하나의 삶을 정답이라고 외치고, 모든 사람을 그러한 삶으로 주체화시키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체화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고유성과 잠재성, 다양성을 배제시키기 때문입니다. 기성세대가 요구하는 삶, 우리사회가 규정하는 정상적인 삶, 자본주의사회가 요구하는 소비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청년들이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다양한 삶의 가능성을 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사회가 규정한 삶과 자신이 추구하는 삶 사이의 괴리감 속에서, 청년들의 자기정체성과 고유성은 모호해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해소되지 않고, 지속적인 불안으로 다가옵니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청년들이 자기신념과 고집을 가지고 도전하지 않는다고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너무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을 우리사회가 존중해주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안 속에서 청년들은 생존하고 있습니다. 사회가 어떤 상황인지 상관없이 긍정을 가지고 도전하려는 청년도 있고, 자신이 선택한 소소한 삶에 대해서 만족하고, 누리면서 사는 청년들도 있습니다. 그렇게라도 불안한 삶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불안한 삶을 고스란히 청년들 개인이 감내하는 이러한 방식은 지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정부도, 정치권도 노력을 기울여 합니다. 불확실성, 제도적 공백 속에서 고립되는 청년들의 삶에 주목해야 합니다. 일자리를 늘리고,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정책과 더불어서, 기본적인 주거, 문화생활을 보장해주는 정책을 마련해야하고, 상처받은 청년들의 마음과 삶을 보듬어주는 세밀한 정책을 개발해야 합니다. 매우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이 당연한 이야기가 실제 청년들의 삶의 현장에서 실행되지 않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더불어 우리사회의 인식도 바꿔야 합니다. 우리사회는 청년들이 자신의 잠재성, 다양한 가능성을 실현하고 도전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도전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서, 존중받고, 만족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사회를 ‘정답 없는 사회’라고 칭하고 싶다. 정답이 없기 때문에, 비로소 모든 가능한 삶이 정답이 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숙제라고 생합니다. 우리사회가 유일하고 정상적인 삶의 모델을 제시하기를 멈추고, 다양한 삶의 잠재성을 인정해주는 사회, 청년들의 주체적으로 선택한 삶을 정답이라고 이야기해주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 우리 사회의 과제인 것입니다. 실효성 있는 정책과 더불어 우리사회의 인식이 변화될 때, 비로소 미래에 대한 모호성, 자기 자신에 대한 모호성으로부터 오는 청년들의 불안은 해소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교회의 역할도 중요하리라고 생각됩니다. 신자유주의, 무한경쟁 속에서 지쳐있는 청년들에게 교회는 어떤 복음을 전해야할까요? 지금 청년들은 세상 속에서 실패를 오로지 자신의 능력부족, 흙수저로 태어난 원죄를 탓하며, 절망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교회는 어떤 복음을 말할 수 있을까요? 기성교회가 대부분 설교하고 있는 성공주의, 무한긍정의 메시지는 복음과 청년들이 느끼는 현실사이에 간극을 더욱 깊어지게 할 뿐입니다. 안전한 공간, 새로운 희망과 생명이 움터야할 교회라는 공간마저도, 더 노력하고, 더 기도하고, 더 비전을 품으라고,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시대 지친 청년들은 어디서 마음을 터놓고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요?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짓게 만드는 왜곡된 율법의 질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복음의 본질로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의미가 오늘날 청년들에게 어떻게 다가설 수 있을지 곱씹어봐야 합니다. “너의 잘못이 아니다. 네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실패를 만들어내는 세상, 무한경쟁을 우상으로 섬기는 세상, 값싼 기복주의를 진리로 포장한 교회가 문제다. 그러니 죄책감을 갖지 말. 절망하지 말고 힘을 내라!” 이것이 오늘날 청년들에게 필요한 복음이 아닐까요?

 

글쓴이: 하성웅 총무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 평화교회연구소 연구원)

 

 

본 글은 NCCK 사건과 신학 2기 <청년과 불안>에 기고한 글은 수정보완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