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들에게 침묵기도를 안내하기 시작한지도 벌써 10년이 넘어갔다. 처음에 침묵기도를 안내할 때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거룩한 독서)’, ‘복음관상기도(이냐시오의 영신수련 중에 나오는 기도 가운데 한 가지)’, ‘센터링 침묵기도(향심기도, 혹은 구심기도라고도 한다)’나 ‘예수기도’(정교회 전통에서 비롯된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 불쌍한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도문을 반복하는 기도), ‘라브린스(Labyrinth 들어가고 나오는 입구가 하나이며 중심까지 거리가 굽이굽이 이어진 길) 걷는 기도’ 등의 다양한 방법을 소개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런 기도를 안내하면서 기도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하는 것이 좋은지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침묵기도를 점점 더 깊게하면서, 또 침묵기도를 안내하는 연수가 오래되면서 침묵기도에 대한 이해나 설명은 점점 변화되고 있다. 그중에 한 가지가 ‘관상’이라는 용어에 대한 것이다.
2.
처음에 기도학교를 시작할 때는 ‘침묵기도’라는 말 대신에 오랫동안 가톨릭에서 사용되어 왔던 ‘관상기도’라는 말을 사용했다. 하지만 2년 정도 ‘관상기도학교’라는 말을 사용하고는 두 가지 이유로 ‘침묵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꾸었다. 첫 번째 이유는 근본주의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관상기도’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공격하는 이유는 그것이 ‘가톨릭적’이라거나, 다른 종교나 명상 단체에서 훈련하는 방식과 유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많으나 여기에서는 거론하지 않겠다. 다만 기도를 새롭게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용어가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분별을 했다는 것을 밝혀둔다.
3.
두 번째 이유는 ‘관상기도’라는 말이 관상기도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전체적인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상(觀想)’ 이라는 말은 영어 ‘contemplation’를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철학계에서는 ‘관조(觀照)’라는 말로 많이 번역되어 왔다. 조용한 마음으로 대상의 본질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철학과는 달리 그리스도교에서는 대상의 본질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기에 관조가 아니라 관상이라는 말로 번역되었다. 번역하는 사람이 고민이 많았을 것이라 생각되나, 아마도 일본에서 먼저 번역된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라 추측해본다. 여하튼 ‘관상(觀想)’이라는 한자어가 꿰뚫어 볼 관(觀)자에 생각 상(想)를 사용한 것은 이 기도의 한 측면을 잘 드러낸 것이다.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꿰뚫어서 볼 때,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4.
하지만 기도하면서 관상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이냐시오에 의한 영성훈련 방법인 <영신수련>에서는 ‘복음관상’기도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 기도 방식은 주로 복음서에 나오는 어떤 줄거리가 있는 에피소드를 기도 가운데 등장인물의 한 사람이 되어 체험하는 것이다. 이때 성경 말씀을 묵상하면서 마치 성경의 에피소드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영화를 보거나, 혹은 등장인물의 한 사람이 되어 말씀을 체험하게 된다. 이때 묵상 가운데 성경말씀이 우리의 오감을 통해 생생하게 체험하게 되는 상황을 ‘복음관상’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줄여서 이를 ‘관상’한다고 말하고 있다.
5.
베네딕트 전통에 따르는 ‘렉시오 디비나’에서도 ‘관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렉시오 디비나는 ‘거룩한 독서’, 혹은 ‘성독(聖讀)’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 기도의 방법은 성경말씀을 ‘읽고(Lectio), 묵상하고(Meditatio), 기도하고(Oratio), 관상하는(Contemplation)’는 4단계로 구성된다. 여기에서도 ‘관상’이라는 말이 사용되지만 ‘복음관상’과는 다른 방법이다. 또한 센터링 침묵기도(향심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도방식을 그냥 ‘관상기도’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이렇듯 기도 방식에서 복음관상, 렉시오 디비나의 관상, 센터링 침묵기도의 관상은 서로 다른 기도 방법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관상기도’라는 처음 들어보는 사람이거나, 자기의 기도 방법을 관상기도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은 같은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서로 다른 내용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6.
이것만이 아니다. ‘관상’이라는 용어는 기도방법에 대한 것이 아니라, 기도 가운데 어떤 체험을 할 때도 ‘관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기도 가운데 이루어지는 이 체험은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지만, 이를 언어를 통해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의 선배들은 이를 다양하게 표현하고자 애를 써왔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전에 썼던 글 ‘하나님과 친하다는 것?’(https://peacechurch2014.creatorlink.net/forum/view/338169)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또한 이것만이 아니라 관상이라는 말은 삶의 어떤 태도와 습관을 표현할 때도 사용한다. 그것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그리고 피하거나 숨고 싶은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 대해 자신의 마음을 열고 경청하거나, 수용하는 신앙적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7.
이렇듯 ‘관상’이라는 말은 기도방법, 체험, 그리고 삶의 태도를 표현할 때 사용하기에 사람들에게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그 용어가 사용할 때 적절한 맥락과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 말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관상이라는 말을 별로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과 이미 자기 나름대로 관상이라는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용하고 있는 용어를 전체적인 맥락을 보여주기 선택한 용어가 ‘침묵기도’였다. 관상이라는 말과는 조금은 동떨어진 듯한 ‘침묵’이라는 말을 선택하는 이 과정은 언어가 끊어진 곳에서 또 다시 언어를 사용하는 언어도단의 세계로서 기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글쓴이: 김오성 목사 (한국샬렘영성훈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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