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트 어만은 그의 책 『고통, 인간의 문제인가, 신의 문제인가』라는 책에서, 성서는 고통문제를 다양하게 해석하는 책으로, 개신교인들에게는 고통이 신앙의 문제로 귀결됨을 말한다. 그러면서 “이 지구라는 행성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은 오직 비참함과 고통의 연속”임을 강조한다. 신정론 문제를 제기하면서, 절대자의 신 그리고 모든 것을 설명하는 신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고 서술한다. 그리고 책 중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이 겪는 고통이 문제를 논리적으로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고통이란 고상한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야 하는 문제다.
고통의 문제가 실존의 문제, 인간의 직접적인 문제가 연결되어 있음을 말한다. 고통을 설명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현실세계의 원인 규명이 필요함을 다시금 말하는 것이다. 이를 오늘 책이 신정론의 관점에서가 아닌 현실 문제에서 살펴보고 있다.
[ 고통의 지층들 ]
<선아> 결혼생활의 어려움을 느끼고, 정신분석 단체를 찾음. 집단 상담을 통해서 “자기 생각과 감정, 욕망과 마음을 알고 그 흐름을 파악해 다스리는 법을 배우는 게 좋”(32)음. ‘자기 공부’을 하기 시작함. 알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서, 억울함을 호소함. “왜 하필 내가?”
<선아2> 자기공부에 열중함. 수양단체에 입문. 108배를 올림. 남편과의 문제와는 별개로 자신의 문제를 발견함. 남편이 사업에 망함.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고통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함. 내면의 세계가 무너짐. “자기가 망했다고 말했을 때 그들이 자기를 바라볼 그 연민의 시선이 끔찍했다.”(46) 부모님에게 절대 말도 못함. “선아가 겪고 있는 고통에서 선아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자기 마음밖에 없었다.”(47)
고통은 고통일 뿐 어떤 가치도 발견할 수 없었다. (중략) ‘억울함’은 ‘후회’와 항상 겹쳐서 반복된다. (중략) 이 ‘억울함’과 ‘후회’의 감정이 선아의 경우처럼 고통의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삶에 대한 반추로 이르게 하여 자기를 발견하게 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34
그 고통을 능동적으로 겪어낼 방법부터가 없었다. 그저 수동적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고통을 당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고통을 계속 겪어야만 한다는 게 더 큰 고통이었다. 그때 선아는 알게 되었다.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이 ‘무가치’이며 ‘무의미’라는 것을 말이다. 무의미한 고통을 계속 겪고 있어야 하는 게 가장 큰 고통이었다. 45
<승우> 백혈병에 걸림. 개신교 신자인 어머니가 간호함. “사람들과의 만남은 그 박탈을 재확인하는 허무함”(36)임을 확인하는 과정. 질병이 ‘자신에 대한 앎’으로 이어짐. “오히려 자기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보자마자 자기 잘 모른다는 것을”(38) 알게 됨. 간병한 어머니에게 짜증부린 것을 후회함. 부모님과 가족에게 감사함. 고통은 홀로 견디는 게 아님을 깨달음.
아프기 전까지 자기는 어쩌면 한번도 스스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이다. (중략) 사회적 욕망이 자기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그 욕망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 ‘자아실현’이라고 봤다. 그 외에 자기가 누구이고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37
“고통은 이제 겨우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반복된다.”(40) 고약하다. 그렇다고 자기를 아는 과정이 고통을 원인을 알고 제거하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에 대한 앎은 고통의 이유를 원인으로 착각하여 자기를 통제하는 것을 통해 고통의 원인을 없앨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40) 이때 우리에게 들이닥치는 것이 고통의 무의미이다. 이는 내면의 파괴한다.
내면이란 자기가 자기와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다.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어떤 언어로든 말을 주고받는다는 뜻이다. 말은 의미를 전달한다. 의미에 대해 물을 때 말은 시작되고, 의미가 있을 때 말을 돌려준다. 48
고통의 무의미는 허무를 소환한다. 그리고 절망하게 된다. 이는 말의 필요성을 잃게 된다. “말을 상실하면 사람은 세상으로부터도,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떨어져 나온다.”(49) 말, 곧 언어는 세상과 사람과 이어주는 매개체다. 이것이 사라지면, 사람은 고립, 혹은 단절 즉 외로운 상태가 된다. 결국, 자기만 남고 홀로 감당해야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재희 어머니> 생활력이 강한 어머니. 일흔이 넘어가면서, 노인성 질환으로 급격히 무너짐. “왜 하필 나에게?”라는 억울함을 가짐. 사회적으로 존재감을 확인했던 그에게 병은 사회적 고립을 가져다줌. 외롭다고 느낌. 그때마다 가족들을 맹비난. “선아의 경우 내면이 무너졌다면, 재희 어머니의 경우에는 세계가 무너졌다.”(52) 이 고통을 가족의 탓으로 돌리기 시작.
<재희 어머니2> 자기 모습에 부끄러워 함. 다른 사람이 자신을 이해하기를 바람. “그가 알게 된 것은 이 고통을 말로 묘사하고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57) 그가 바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자신을 알아주는 것. “너넨 모른다.” 병원쇼핑을 시작함.
재희 어머니의 이야기는 고통을 겪는 사람이 고통의 주체가 아니라 고통이 그 주체임을 보여준다. 그 고통이 몸과 마음을 모두 장악하면 눈앞에 다른 타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고통만이 타자이다. 그러나 그 타자와 주체의 자리는 바뀌어 있다. 고통이 주체가 되어 타자가 된 자신을 응시하고 이끌어간다. 54
육체적 고통에 대한 자신의 호소가 이어지면서 가족들과 그동안 함께 구축해왔던 공감과 존중, 사랑과 정 등 온갖 끈끈한 ‘공동의 감정’이 무너졌다. 그들과 자신이 교감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홀로 버려졌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고통만이 남겨졌다. 이보다 더 강력한 실존적 고통은 없다. 58
+고통은 말할 수 있는가?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복수성plurality을 띤다. 따라서 “‘공동’이 붕괴할 때, 복수성의 존재인 인간은 끔찍한 실존적 죽음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59) 공동이 공동이 아니게 될 때, 실존적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공동의 집은 서로 교감하고 소통하는 ‘언어’로 지을 수 있는데, 고통을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없기”(59)에, 언어가 아닌 언어로 존재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것이 종교다.
<덕룡 아버지> 아내와의 사별. 모든 고담준론들이 허무해짐. “불교는 역설적으로 말로 가득 찬 종교였다.”(63) 동생이 그를 돌봄. ‘주문’을 접하게 됨.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주문을 욈. “신도들과 신, 즉 곁이 생겼다는 말은 다시 나갈 장소가 생겼다는 것이다.”(65)
방언과 주문은 일종의 ‘텅 빈 기표’역할을 한다. 말을 하는 것이긴 하되 그 말에 특정한 의미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빈 밥그릇 같은 것이다. 중요한 거은 내가 입을 열고 그 말을 소리 내어 했다는 점이다. 그 ‘소리’에 내가 말할 수 없었던 그 ‘말’이 담긴다. 그 소리를 말로 듣는 것은 오로지 신밖에 없다. 67
<준석> 애인에게 배신당함. 식물을 키우기 시작. “인간의 세계가 ‘말’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식물과의 관계는 ‘손’으로 이뤄졌다.”(69) 하지만 지속적으로 우울이 찾아옴. 식물에게 마음을 주는 것이 공허해짐.
말하고 싶지 않음, 그러나 말하고 싶음. 말을 하지 않으면 아예 이해를 받을 수 없지만, 말을 하면 이해가 아니라 오해만 쌓이고 거리가 멀어졌다. 아예 이해를 기대하지 않는 것이 편했다. 71-72
“고통은 사람을 실존적 존재로 만든다.”(73) 하지만 모든 고통에는 사회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고통의 실존적 측면은 철저히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할 필요가 없다.”(76) 그래서 실존적 측면을 사회적으로 나누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충연> 영화 공동정범의 인물. 용사참사 당시 철거민대책위원회 위원장. 조사 중에 묵비권을 행사함. 철거민들은 그에게 배신감을 느낌. 그는 “실존의 고통에 사로잡히지 않아야만 진상을 규명하는 일을 할 수 있다.”(78-79) “‘말’을 통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고통의 사회학적 측면이다.”(80) 사회에서는 효용성이 먼저다. “사회가 참사에 귀 기울이게 할 수 있는 ‘언어’”(82)가 존재한다.
이충연이 보기에 용산참사는 그들 ‘사이’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그들과 세계, 그들과 권력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렇기에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그들 ‘사이’를 복원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은 무의미하며 위험하다. 자칫하면 권력과 그들 사이의 문제는 사라지고 참사의 당사자들 사이의 문제에 매몰될 수 있기 때문이다. 79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그 고통을 심판한 언어로 자신의 고통을 말함으로써 그 언어는 심판되지 않고 오히려 심판의 언어로 다시 한번 재생산되는 것이다. 이때 전복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것이 법의 언어가 끈질기게 살아남는 방법이다. 82
“실존은 늘 사회의 잔여범주로서 존재에 달라붙어 있다. 여기에 고통의 딜레마가 있다.”(84) 고통을 벗어난다는 것은, 헤르베르트 플뤼게의 『아픔에 대하여』에 책에서 말한 바와 같다.
몸은 그저 통증에서 해방되어 다시금 순수하게 회복된 신선함으로서, 다시 써도 좋다고 알려준다. 나는 다시금 자유다. 나는 다시금 무엇인가 할 수 있다. 의식은 일차적은 “나는 생각한다”는 의식이 아니라 “나는 할 수 있다”의 의식이다. 내 몸과 세계는 이제 통증으로부터 해방된 것으로 다시금 주어졌다. 나는 몸과 세계를 선물로 여기며, 다시금 주변에 관심을 쏟을 수 있다.
+고통을 말끔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마법의 언어는 없다.
“선아는 그 과정에서 자기에게 ‘언어’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자기를 바라보고 사태를 다룰 수 있는 언어가 생겼다고 믿었다.”(85) 이는 마음과 분리라는 단어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서 “문제의 사회적 측면이나 실존적 측면을 직면하지 않고 오히려 회피하게 만들고 있었다.”(87)
<태석> 교사모임에 들어감. 자신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공간. 교육현장에 실망감을 느낌. 처음에는 자신의 무능으로 여김. 모임을 통해서 사회구조적 문제임을 깨달음. 모든 것을 신자유주의 탓으로 돌림. 점점 고립됨. “‘사회학적 언어’는 태석을 점점 더 무기력하게 만들었다.”(94) 말을 할수록 사회는 설명되었지만, 자신은 설명되지 않음.
몇몇 모임은 당사자들이 겪은 사안을 지나치게 빨리 사회학적 문제로 돌림으로써 그렇게만 인식하게 만들어버린다. 그 결과 고통의 ‘개별성’은 앙상한 것으로 날아간다. 고통을 개인화하는 잘못을 경계하면서 제거되지 않는 고통의 실존적 측면을 간과하는 것이다. 사회학적 언어는 고통의 고유함과 개별성보다는 사회성에만 주목하기 때문에 당사자 개개인의 구체적 사연들이 종종 ‘공감’이라는 말로 너무 빨리 휘발되어버리기도 한다. 90
주문은 공동체를 만드는 단어이지만, 작은 세계에 고립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주문에는 ‘보편성’이 존재하지 않고, ‘구체성’ 또한 결여되어 있다. “고통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사회적 측면, 관계의 측면, 그리고 실존적 측면이 있다.”(97) 이 세 가지 모두 포용하는 ‘마법의 단어’는 없다. “세계와 주변-결과 내면을 동시에 구출할 수 있는 그런 단 하나의 ‘마법의 단어’는 없다.”(97)
[ 고통의 사회학 ]
고통을 겪는 이에게는 언어가 필요하다. ‘신중한 언어’가 필요하다. 그리고 존재감도 필요하다.
자신이 무엇에 말 걸고 있는지에 대해 알지 못하며 마치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고통을 겪는 이를 현혹한다. 때로는 사회과학의 언어로, 때로는 종교의 언어로, 때로는 심리학의 언어로 현혹한다. 그 말들에 의탁해 잠시 고통을 잊을 수는 있지만 이런 말들은 고통을 겪는 이를 망가뜨리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132-133
현재, 터부시 여겼던 고통의 이야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그러면서 신중한 언어들이 사라지고 있다. “고통의 이야기가 주류가 되면서 어떻게 신중한 이야기가 공론의 장에서 밀려나고 그 자리를 납작한 언어가 차지하게 되었는가. 그리하여 결국 고통을 납작하게 만들었는가”(134)를 살펴봐야 한다.
사람의 존재감에는 세 가지 영역이 있다. 사회적 영역, 친밀성의 영역(곁), 내적 영역(자존감)이다. 요즘은 내적 존재감을 강조한다. 그런데 “사회적 존재감과 곁의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 내적 존재감을 가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136) 먼저 사회적 존재감은 ‘성과’를 내야 한다. 이는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차원이다. 판별기준이 분명히 존재한다. 성과를 통해 인정받으며, 성장했음을 느낀다. “학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바로 이런 인정 체제를 자연스럽게 배우고 몸에 익히는 것이다.”(140)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노동에 참여해야 한다. “노동으로부터 배제된 사람이 자기 존재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갖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141)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노동을 하면서 존재감을 느끼지 못한다. “특히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노동은 ‘지급되는 노동 paid work’, 즉 임금을 받을 수 있는 노동이다.”(142) 이외 노동은 노동으로 가치가 낮거나 없는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노동 외적인 것에 가치와 성과가 매겨진다. “성과는 철저하게 ‘위계화’되어 있다.”(143) 오늘날과 같은 저성장사회에서는 놀랄만한 성과내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대한민국 입시체제이다.
자신이 대체되는 존재라는 것만큼 존재감에 큰 상처를 주는 일은 없다. 존재감이란 잘났건 못났건 간에 자기가 고유하고 유일무이한 존재이기 때문에 대체될 수 없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스스로를 대체 가능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한 존재감의 고양은 기대할 수 없다. 그저 대체 가능한 부품으로서 늘 허무함을 느끼며 위축되어 살아갈 뿐이다. 145
현재, 인정 이전에 이보다 먼저, 관심을 끌어내야 한다. “관심을 상품화한 것이 바로 주목”(146)이다. 또한 이는 플랫폼을 통해서 장사가 되기 시작한다. 시장이 원하는 방식으로 고통을 말할 때, 주목받는다. “고통을 파는 이야기의 포맷은 피해자의 피해자됨과 비참함을 강조하는 방식이다.”(149)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들이 경쟁을 하게 된다. 즉 “피해자는 자신의 존엄을 파괴할수록 그걸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러기 위해서라도 포르노처럼 자기를 드러내야 한다.”(149) 관심이 먼저이고, 인정이 그 다음이다. 점점 더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선정성이 판을 치게 되고, 점점 강도는 극에 다다른다.
친밀성의 영역은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고, ‘대체 불가능성’의 범주에 들어선다. “현존의 기쁨이다.”(154) 현존이 기쁨의 원천이기에, 이 영역 안에서 양자관계는 ‘비대칭성’이 있다. 우정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과 우정의 비대칭성의 핵심에는 앞서 언급한 루만의 책에 나오는 것처럼 인격에 대한 존중이 있다. 사랑을 받는 이는 ‘현존’으로 족하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는 그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선물과 같은 ‘행위’를 해야 한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가 존중이다. 상대방을 그 자체로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를 존중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다. 사랑하는 이는 사랑받는 이의 ‘인격’을 존중해야 한다. 156
오늘날은 인격이 무시되고, 사랑이 구조화되고 말았다. 특별히 “이 시대의 사랑은 여성을 역할이 아닌 개별적 인격체로 대하는 법에 관해 전적으로 무지했다.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하면서 말이다.”(158) 진정한 ‘나’로서 존중받지 못했다. “자유롭고 평등한 개체적 인격으로”(159) 대하지 못했다. 사랑과 우정의 관계에는 “근본적인 불안”(160)이 내제한다. 버림받을지 모르는 공포, 확신을 갖지 못하는 불안을 갖고 있다.
현존의 기쁨에 대한 확신이 불가능해진 상태에서 친밀성의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유익한 존재’가 되어 그의 관심을 끄는 수밖에 없다. 유익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유익한 것인 한 그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중략) 사회적 영역처럼 친밀성 영역에서도 존재감은 ‘현존’이 아니라 필사적인 관심 끌기로만 가능한 것이 되었다. 161
“친밀성의 관계는 이익을 가시화하는 순간 사실상 붕괴한다.”(164) “친밀성의 관계에서 가장 큰 유익은 ‘존재론적 안정감’이다.”(165) 그래서 서로 간의 확신이 매우 중요하다. 이 관계에서 확신이 없다면, 유익을 줘서 관계를 지속시켜야 한다. “내가 이전에 준 유익보다 다음 유익이 더 커야”(167) 하고, “다른 사람이 주는 유익보다 커야 한다.”(167) 그러기 위해서는 경쟁을 벌어야 한다.
언제나 더 큰 유익을 줘야 한다는 것은, 이 공간이 상시적인 인플레이션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곳은 늘 ‘더’가 지배하는 공간이다. 점점 더 센 것이 나와야 한다. 이전보다, 남보다 더 큰 것만이 관심을 끌 수 있다. 모두가 경쟁하여 관심을 끄는 것의 강도가 더욱 높아지니 당연히 상대방 관심의 역치도 함께 높아진다. 168
“친밀성의 관계는 원래 ‘기쁨’에 기초해 구축된다.”(168) 이 기쁨은 현존으로부터 온다. 현존의 기쁨을 바꿔치기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재미’이다. 기쁨과 재미는 유사하다. 하지만 재미는 현존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재밌게 하려면 끊임없이 행위를 해야 한다. 이 행위를 소비한다. 기쁨이 타자의 현존과 관련된 것이라면 재미는 타자를 소비한다.”(170)
기쁨과 재미는 표면적으로 비슷해 보이지만 그 의미와 가치, 그리고 작동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확신을 잃은 친밀성의 관계에서 기쁨은 가능하지 않고 그 자리를 재미가 대체한다. 재밌는 것을 통해서만 관심을 끌 수 있고, 관심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더욱더 재미있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렇게 재밌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면 존재감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존재감을 위해 관심을 끌어야 하고, 관심을 끌기 위해 재밌는 인간이 되어야 하고, 재밌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플레 인간’이 되었다. 171
사회적 영역과 친밀성의 영역은 겹쳐진다. 이 안에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사교’다. 사교의 기술에서는 각 자가 가면을 쓰고, 그 역할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상대방의 가면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하고, 가면 뒤의 맨얼굴을 알면서도 적절히 모른 척할 줄 알아야 한다.”(173) 하지만 이 가면이 웃음과 조롱에 이용된다. 웃음을 자아내는 방식 중 하나가, 소수자를 조롱하는 것이다. “‘정상인’이 보기에 ‘결여’가”(176) 있는 이들은 “‘모자란 존재’이며, 그 모자람이 비하와 조롱의 이유이자 대상이다.”(176) 심지어 이들은 인간이 아니기에 웃음을 유발할 수 있다. “이러한 웃음은 존재의 고양이 아니라 하락에서 비롯된다.”(177)
소수자들이 느끼는 고통은 그 이외의 다른 존재로 존재감을 가질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존재감이 대체 불가능성이라는 고유함에서 온다고 한다면, 소수자들은 각각의 자기 이름을 가진 개별적 존재, 즉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는 언제나 범주화된 집단의 이름인 ‘소수자’로만 불리고 사회적 가치를 가지게 된다. 심지어 그의 고통을 이야기할 때조차 그가 말해야 하는 고통은 소수자로서의 고통이지 그 외의 다른 고통은 무시되고 삭제된다. 177
조롱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방식은 가면을 폭로하는 것이다. 위선을 폭로하는 것이다. “인간의 위선에 대한 폭로의 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혐오’가 깔려 있고 그 가운데서 혐오가 정당화된다.”(179)
사실 위선에 대한 폭로에는 일종의 ‘선line’이 있었다. 그것은 주로 권력자의 위선에 대한 폭로였지 무차별적인 것은 아니었다. 가지지 못한 자의 어리석음을 폭로하는 경우에는 최소한의 연민이 보태졌다. 그런 사람의 무언가를 폭로하는 것은 그를 그렇게 만든 사회의 비참함과 비극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지 ‘모자란 사람’ 자체를 비하하고 조롱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 두가지는 구분되었다.179
조롱을 당하는 자에게는 고통이 따라온다. “당하는 사람의 고통은 웃음과 비례한다.”(180) 존재감이 하락된다. 사교술에서는 웃음은 보조수단이었다. 그리고 그에 맞는 예의나 수위가 존재했다. 하지만 오늘날 “웃음은 사교의 보조적인 기술이 아니라 본체가 되었다.”(182)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가능하다. “비하와 조롱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유발하는 것이 곧 바로 재미가 된다.”(182)
웃음은 존재의 하락에서 온다. 존재의 하락에서 사람이 경험하는 것은 인격의 파괴다. 인격이 파괴될 때 개별자로서의 고유함과 존엄은 사라진다. 따라서 존재의 하락을 겪는 사람이 느끼는 것은 비참이다. 조롱과 폭로를 통해 관심을 끌려고 하는 사람들은 바로 ‘비참의 전시’를 통해 재미를 유발하려고 한다. 타인의 인격과 존엄을 파괴하고 그 비참을 전시하는 것을 통해 관심을 끌려고 하는 사람, 이들은 우리 사회는 ‘관종’이라고 부르고 있다. 183
세월호 5주기다. 우리 주변의 고통에 마주하고 있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 고통은 Neverending story가 되어 버렸다.
`최선`을 다하겠단 얘길 들었다. `최대`한 힘쓰겠다는 말도, `모든 걸 동원`하겠다는 약속도 들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해 들었다. 그럴듯한 말들은 주로 `위`에서 내려왔다. 그 안에는 부사와 형용사, 서술어와 추상명사가 많았지만 시제와 동사, 주어와 고유명사는 잘 보이지 않았다. 곧이어 `책임`이란 말이 들려왔다. `적폐`라는 말, `엄벌`이라는 말도 등장했다. 그런데 그 말을 끝까지 다 들어도 대체 누가 무엇을 어떻게 책임지겠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죄송하다`는 말보다 `기다려달라`는 청보다 선명하게 들린 건 지도층의 막말과 실언이었다. 그리고 그중 어떤 말은 결국 유족을 거리로 나서게 했다. 어버이날, 두 팔을 올려 벌서듯 자식들의 영정을 들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어쩌면 정부가 말한 `최선`과 `최대`의 대상은 국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부는 계속해서 명령을 내리고 민심을 달래는 `입`이길 자처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국민들이 간절히 원한 건 권력의 `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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