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자리/신학마당

살아나신 예수님과 일으켜지신 예수님

minkyo 2022. 5. 12. 09:32
주간 평화교회 101호| <신약따라걷기> 살아나신 예수님과 일으켜지신 예수님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절기를 꼽으라면 누구라도 주저 없이 부활절을 꼽을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진리이자 그리스교라는 종교 전체를 지탱하는 주춧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은 당시 그레코로만 문화의 핵심 근거지인 아테네를 방문한 바울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그의 전도의 결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보도한다. “그리고 몇몇 에피쿠로스 철학자와 스토아 철학자도 바울과 논쟁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몇몇 사람은 ‘이 말쟁이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가?’ 하고 말하는가 하면 또 몇몇 사람은 ‘그는 외국 신들을 선전하는 사람인 것 같다.’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바울이 예수를 전하고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었다.”(행 17:18) 예수와 부활, 사도행전이 요약한 바울 복음의 핵심은 바로 이 두 단어였다.

    신약성경에서 부활을 표현하는 여러 묘사 중 가장 자주 사용되는 표현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라는 표현이 아니라 ‘일어나셨다’라는 표현이다. 예를 들어 가장 처음 기록된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부활의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놀라지 마시오.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는 살아나셨소.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소. 보시오, 그를 안장했던 곳이오.”(막 16:6) 새번역 성경의 번역인 “그는 살아나셨소.”처럼 우리말 성경 대부분이 ‘그가 살아나셨다.’라는 식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의 단어 ἠγέρθη(에게르테)는 ‘살아났다’는 뜻이 아니라 ‘일어났다’는 뜻이고, 보다 정확한 문법적 사항을 적용하자면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로서 ‘일어났다’가 아니라 ‘일으켜졌다’는 뜻이다. “일으켜지셨다.”라는 표현은 신약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묘사하는 가장 일반적인 표현방식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우리말 성경번역은 이 ‘일으켜지셨다’라는 표현을 거의 모두 ‘살아나셨다’로 바꾸어 번역하고 있다. 다음의 성경구절들은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들이다.

    “그리고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전하기를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 나셔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그들은 거기서 그를 뵙게 될 것이라고 하여라.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이다.”(마 28:7)

“모두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눅 24:34)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야 그가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서 성경 말씀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 2:22)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롬 4:25)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롬 6:4)

    이 구절들에서 진한 이탤릭체로 표시된 모든 단어들은 헬라어 원문에 ‘살아나셨다’가 아니라 ἠγέρθη(에게르테), 즉 ‘일으켜지셨다’로 표현되어 있는 단어들이다. ‘살아나다’와 ‘일으켜지다’는 엄밀하게 다른 의미를 지닌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말 성경이 이런 식으로 바꾸어 번역한 것은 일차적으로 수동태를 잘 사용하지 않는 우리말의 관습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다시 사신 예수님’이라고 교회가 즐겨 표현하는 것처럼 ‘살아나셨다’는 말이 의미적으로는 그렇게 틀린 말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살아나셨다’라고 표현하는 것과 ‘일으켜지셨다’로 표현하는 것 사이에는 우리의 소망과 관련하여 뜻밖에도 생각보다 깊은 차이가 존재한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로 이해한다면 이 부활은 철저하게 예수님의 능력과 관련된다. 예수님 스스로 다시 일어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더 나아가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에 마땅히 가능하고 자명한 일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이렇게만 이해하고 만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당신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실 수 있지만 인간인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의 예수님의 부활은 놀랍고 기쁜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기적이 되고 만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예수께서 일으켜지셨다.”로 이해한다면 이와는 전혀 다른 사정이 펼쳐지게 된다. 만일 예수께서 일으켜진 것이라면 예수를 일으킨 주체가 반드시 존재한다. 그리고 이 주체는 당연히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일으켜지셨다.”는 수동태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일으키셨다.”는 능동태로 바꾸어 읽을 수 있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이 선언은 마침내 우리와 관련이 있는 선언이 된다. 만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면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역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우리를 동일하게 일으키실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일으켜지셨다.”는 선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위한 선례와 본보기가 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표현하는 ἠγέρθη(에게르테)가 의미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이 예수의 부활과 우리 부활의 소망을 역설한 고린도전서 15장 역시 ‘일으켜진다’라는 표현으로 점철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다’ 또는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다’라고 우리말 성경이 번역한 모든 곳을 헬라어 원문은 ‘일으켜지셨다’라는 단어로 표현한다.(4,12,13,14,16,17,20절) 차이가 있다면 ἠγέρθη(에게르테)와 같은 과거형이 아니라 ἐγήγερται(에게게르타이)라는 현재완료형이 사용되었다는 것뿐이며, 둘 다 수동태라는 사실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 더 나아가 고린도전서 15장의 헬라어 원문은 예수님의 부활이 아닌 우리의 부활 역시 ‘일으켜진다’라는 말로 표현한다.(15:15-16) 그리고 바울은 예수의 부활과 관련된 사실에는 하나님이 주체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선언한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정말로 없다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살리지 아니하셨을 것입니다.”(고전 15:15) 그리고 동시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에 대한 선례와 본보기가 된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게 선언한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고전 15:20) 성경의 마지막 소망을 담은 요한계시록 역시 이 점을 분명히 하며 박해받으며 죽어가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한다. “또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이시요,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계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할 때마다 살아나신 예수님보다 일으켜지신 예수님을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그 자리에, 우리의 모든 소망 역시 달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죽음을 넘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 거기에 나타나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드러나는 곳이다. 죽음을 맞이하실 때에 참 인간으로 죽으신 예수님은 부활하실 때에도 변화된 몸과 함께 참 인간으로서 부활하신다. 하나님은 참 인간으로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셨고, 그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이 되시고 위로가 되셨다. 그리고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은 하늘로 오르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그렇게 그분이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은 죽어 있던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일으키셨던 것처럼 다시 일으키실 것이며, 최후의 심판을 넘어 우리를 영생으로 이끄실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다.